건축, 조경하는 사람들은 서양 학계가 정리한 건축사, 조경사는 배우지만 우리나라 전통 건축, 조경에 대해서는 그다지 배우지 않는다. 오히려 이 영역은 역사하는 사람들, 고고미술학자들이 다루며, 그들의 시각이 견지된 책이 많다. 예술도 그렇겠지만 건축엔 아이덴디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이에 대한 공부가 더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음은 유홍준 교수가 쓰신 한국미술사 강의2 중 건축파트만 요약하고, 내 생각을 간략히 정리한 글이다.
통일신라의 미술사를 설명하기에 앞서, 유홍준 작가는 통일신라라는 용어를 재해석하였다. 신라문화는 신라 사람들이 만든 것인데, 신라 사람들에겐 통일신라라는 말자체가 없었다. 대신 그들은 신라 1천년의 역사를 상대, 중대, 하대로 구분하였다. 각 왕조의 출신을 기반으로 나눈 듯하다. 특히 미술사를 보면 중대와 하대의 차이는 두드러진다. 중대신라는 당나라가 물러가고 한반도에 간만의 평화가 찾아온 시기다. 독자적인 문화가 꽃피우기에 충분했다. 반면 하대신라는 문화가 내리막길로 들어서는 때라고 할 수 있다. 왕권은 곤두박질치고, 건축 역시 매너리즘에 빠진다.
불교가 국교였던 신라는 호국불사의 심정으로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이기고자 하였다. 그 의지가 담긴 사찰이 바로 사천왕사이고, 그 속에서 신라의 가람양식이 잘 나타난다. 신라의 가람(절의 형식)에는 왜 등장하였는지는 모르지만 쌍탑 양식으로 기틀이 다져졌고, 그것이 이후에도 이어진다. 쌍탑은 건축적 리듬을 가져온다. 지금의 쌍둥이 빌딩이 그러한 것처럼. 신라인들은 건축미를 알았다.
신라 건축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25년여 만에 완성된 불국사다. 불국사 대웅전 영역은 고전 미술의 3요소 비례, 균형, 조화의 원리가 명확히 적용되어 있다. 비례관계는 정확하면서도 평면의 대칭이 입면의 비대칭과 어우러져 건축 콘셉트를 만들어냈다. 이런 비대칭의 대칭은 한국 건축의 중요한 특징이다. 신은 디테일에 있다고 말한 현대 건축가 미즈 반 데어 로에가 불국사를 본다면 어떤 말을 했을까. 불국사 곳곳에는 디테일이 살아있다. 대웅전을 오르는 소맷돌은 삼각형을 이루면서 그 끝이 곡선을 그린다. 또 연화교에서는 계단마다 음각으로 새겨져있고, 칠보교에는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다. 주목하지 않을 곳까지 주목하였다.
지금도 경주를 가면 수많은 왕릉들을 볼 수 있다. 얼핏 보면 비슷해 보이는 외관이지만, 자세히 보면 아무런 장식이 없는 것도, 일정한 간격의 자연석이 있는 것도, 호석을 비스듬히 세운 것도, 호석에 십이지를 세운 것도 모두 왕릉이다. 이러한 양식들의 변화는 하나의 흐름으로만 설명될 순 없다. 하대신라에 들어서는 왕의 권위가 예전과는 다르고, 비극적인 왕의 죽음도 있었기에 그때마다의 정치적 분위기가 치장을 결정했다.
고려는 통일신라의 불교문화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경주지방에만 몰려있던 사찰이 전국으로 퍼진 것은 고려 시기였다. 그리고 석탑이 가장 발달하여 중국, 일본과는 다른 전통을 만들어간 때이다. 고려의 석탑은 지역에 따라 매우 다양하였다. 5층, 7층, 9층 등 형식도 달랐으며, 제주도에서는 현무암으로 독특한 석탑을 세울 정도였다. 반면 백제지역에서는 복고풍의 3층 석탑이 성행하였으며, 고구려 지역에서는 팔각다층 석탑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아직까지 지역마다 삼국시대 양식이 독자적으로 남아있었고, 고려는 양식들을 포용했다. 고려 문화가 지닌 다양성이 보여주는 부분이다.
고려는 확실히 앞 시기 통일신라와는 다른 건축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풍수지리설에서 촉발된 자연 조건과 조화를 이루는 건축 정신이다. 풍수지리는 신라말기에 들어와 고려시기에 한반도에서 발달한다. 이는 후에 조선시대 건축으로도 이어져 하나의 민족적 전통으로 확립된다. 개성의 도성은 송악산을 등에 지고 넓은 들판을 내려다본다. 서로는 예성강이, 동남으로는 임진강이 흘러간다.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형태이다.
고려시대 사찰은 통일신라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름을 엿볼 수 있다. 고려시대 절의 진입로는 사찰 건축의 일부분이었다. 남북 일직선상에 정연한 가람배치 형태의 신라와는 완연히 다르다. 실내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고려시대 사찰의 강당은 앞으로 나와 있다. 이런 양식은 조선시대로 이어진다.
고려시대 왕릉은 개성 부근에 몰려 있다. 신라 왕릉이 경주 부근에 밀집되어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고려시대 왕릉 역시 대개 돌방무덤이며 십이지상이 둘러져 있다. 하지만 공민왕릉은 따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공민왕릉은 공민왕의 현릉과 왕비의 정릉이 나란히 있는 쌍무덤이다. 공민왕 14년에 왕비가 죽자 공민왕이 직접 설계하고 감독하여 9년이라는 기간에 걸쳐 건립되었다. 왕릉의 경사면은 석축으로 쌓아 3단으로 나누고 호석에는 십이지상과 연꽃을 조각하였다. 속은 대단히 복잡한데 장식성이 지나쳐 기품을 보여주기엔 부족한 감이 있다.
사실 나는 한국의 전통건축을 생각하면 서울에 남아있는 조선시대 한양도성 건축만을 생각했다. 그러기에 이번 책은 나에게 특별하게 다가왔다. 조선시대 건축이전에는 고려시대와 신라의 건축이 엄연히 존재해왔던 것을, 그리고 그것들을 하나로 관통하는 우리 민족의 정신이 있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현대건축의 역사는 1900년부터 봐도 100년 정도를 가진다. 허나 전통건축은 몇 천년에 걸쳐서 이루어지던 것이다. 그 안에 담겨진 생각과 경험의 양이 다르다. 그 사이 트렌드는 수없이 바뀌고 패러다임은 뒤집혀졌지만 어딘가 모르게 닮아있다. 같은 동양권인 중국이나 일본의 전통건축을 봐도 그렇다. 디테일과 양식은 너무 다양한데 느낌이랄까, 그 건축이 내뿜는 아우라는 닮아있다.
나는 사람에게 문화적 유전자인 밈이 있는 것처럼 건축에도 문화적 유전자가 있다고 생각한다. 건축은 사람이고, 사람이 건축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 땅에서 건축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전통건축을 공부해야만 한다. 아무리 서양건축사가 주류고, 국제 트렌드는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어도 말이다. 가끔씩 도쿄의 거리나 서울의 거리나 베이징의 거리나 다 비슷하다는 말을 들으면 조금 슬프다. 100년, 200년 전만해도 교류를 하면서도 자기만의 색을 구축하던 문화건축이 어느새 다른 이상향을 쫓고 있는 것인가. 그러지 않기엔 힘든 환경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