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레미 레프킨의 『육식의 종말』을 처음 마주한 건 고등학교 때였다. 교내독서경진대회 때문에 의무적으로 이 책을 읽었던 그때는 육식의 무책임함이 쉽사리 다가오지 않았다. 문장은 수려하고 사실은 충격적이었지만 그렇다고 채식을 하기엔 현실적 가능성과 개인적 용기 둘 다 미흡하던 때였다. (급식만 봐도, 채식이 다 뭔가!)
이 책을 다시 집어든 지금, 나는 채식을 시작한지 4개월째. 용기보다는 가능성이 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스웨덴에서 교환학생을 하면서 채식이 이토록 쉽다는 걸 처음 알았다. 가령 왠만한 식당이나 카페에는 베지테리언(Vegetarian; 동물에서 나온 식품 혹은 제품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 메뉴가 따로 마련되어 있다. 심지어 비건(Vegan; 베지테리언 중에서도 달걀, 유제품까지 먹지 않는 사람)을 위한 락토프리 빵이나 아이스크림도 볼 수 있다. 또 마트의 채식용 제품 코너에 가면 다양한 형태의 콩고기, 두부, 식물성 버터와 우유까지도 다 구할 수 있다. 정말 이것들이 21년된 나의 육식을 완벽히 대체할 수 있을까? 반신반의하며 먹어보았다. 맛, 영양, 가격 모든 면에서 고기에 뒤처질 게 없었다. 이 정도면 육식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 육식을 하지 말아야할 이유는 무엇인가. 몇몇 사람들이 물어보았다. 간단하지만 정곡을 찌르는 질문. 동물에 대한 동정심으로 답하면 이해는 쉽지만 그만큼 설득은 하기 어렵다. 채식은 단순한 식사법이 아니라 운동(movement)이다. 채식의 명분 중 많은 부분은 설득에 있다. 내가 이 책을 다시 찾게 된 이유다. 설득 당하기 위해서가 아닌, 이번엔 설득하기 위해서.
'쇠고기를 넘어서(Beyond beef)'라는 원제에 걸맞게 제레미 레프킨은 육식 중에서도 소 소비의 비참함을 폭로한다. 육식의 종말을 설파하기 이전에 그는 일찍이 세계 각지에서 일어난 육식의 부상을 먼저 설명한다. 소가 인간의 배를 채울 도구로 전락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힌두교의 암소, 스페인의 투우 등 여러 문명에는 소 숭배신앙이 존재했다. 그러다 유럽인들의 식민지 시대가 시작되면서 소는 개인의 부와 사회의 발달단계를 드러내는 소비물품으로 전락했다. 유럽, 특히 영국인들은 늘어난 쇠고기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식민지의 땅을 목초지로 개발했다. 이 과정에서 원주민들은 소를 돌볼 '카우보이'로서 착취당하고, 그들의 생계수단이었던 버팔로는 모조리 학살되었다. 쇠고기의 재앙은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고 차별하는 역사와 함께 싹튼 것이다.
책을 정리하자면, 육식으로 피해를 입는 대상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물론 동물이다. 레프킨이 첫 장에서 언급하듯 소의 생애는 온갖 화학약품과 절단, 격리, 운송으로 얼룩져있다. 인공수정된 암소에서 태어난 송아지는 양질의 쇠고기를 위해 바로 거세당하고 뿔이 잘린다. 비육장에서 송아지는 각종 약물을 투여받으며 사료를 먹고 자란다. 체중이 충분히 불어나면 소는 도살장에서 기절된 후 토막토막 잘린다. 레프킨이 책을 쓴 지 20년이 지난 지금도 이 과정은 더 달라진 것이 없다. 대신 더욱 은폐되고 객관화되어 우리 일상 속에서 당연하게 자리잡을 뿐이다.
인간이 얻는 피해도 만만치 않다. 마블링이 잘된, '기름진' 고기를 위해 소는 곡식을 먹고 자란다. 전세계 곡식 생산량 중 인간이 실제로 먹는 것은 55%에 지나지 않는다. 레프킨은 1/3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그보다 조금 더 많은 36%의 곡물이 가축 사료에 쓰인다. 이는 매우 비효율적인, 말그대로 곡식 낭비다. 100칼로리의 곡물로 생산할 수 있는 소고기의 칼로리는 3칼로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네셔널지오그래픽,
2014, http://www.nationalgeographic.com/foodfeatures/feeding-9-billion/ 참고) 지금도 누군가는 1A++등급 소고기를 먹고 비만으로 고생할 때, 세계 반대편에선 아이들이 옥수수죽 한 그릇을 못 먹어 굶어죽고 있다.
끝으로 육식의 최대 피해 수혜자는 지구다. 세계적으로 성장한 축산업은 △아마존 열대우림 파괴 △사막화 △수질오염 △토착 식물과 동물군 멸종에 따른 생물 다양성 훼손 △지구온난화 등을 낳는다. 환경 보호에 대한 무책임은 흔히 '나 한 사람'의 사소함에 집착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이제껏 살아오면서 우리는 이미 무시못할 정도로 많은 지구의 자원을 썼고 앞으로도 계속 상호 영향을 끼치며 살아갈 것이다. 환경을 생각하는 것은 내 삶이 지닌 가치를 인정하는 일이다.
최근 살충제 계란 파동으로 안전한 먹거리에 대한 관심과 함께 베지푸드도 조명을 받고 있다. 서울에도 한두 곳씩 채식 전문 식당들이 생기는 것을 보면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직까지 걱정되는 것은 사회적 분위기다. 한국에서 채식은 멋지기는 커녕, 불편만 끼치고 관심병에 걸린 소수자적 취향으로 취급된다.
스웨덴에서 채식이 쉬운 또 다른 이유는 채식주의자를 바라보는 시선에 있다. 사람들과 함께 식사할 때 고기를 못먹어도 사회 생활에 아무 지장이 없다. 아무도 이상하게나 신기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채식을 선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런 환경에서 채식은 일종의 '으쓱함'까지 선사한다. 나는 누군가 채식이 멋져보여서 시작했다고 하면 적극 찬성한다. 그런 '겉멋'은 바람직한 겉멋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채식은 대단한 선언이 아니다. 다이어트나 금연처럼 사소한, 그러나 그 자체로 내포하는 의미는 많은 결심이다. 나도 처음엔 고기를 조금씩 줄이는 것으로 시작해서 지금까지도 완벽한 베지테리언은 아니고 달걀, 우유, 해산물은 먹는 페스코 베지테리언이다. 자신에게 맞는 방식대로 서서히 '맛있는 것'의 기준을 바꿔나가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언젠가는 이 사회에서도 '육식의 종말'을 꿈꿀 수 있지 않을까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