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래 없이 읽으면서 피식 웃음이 났다. 유쾌했기 때문이다. 소설의 배경은 ‘이갈리아’라는 가상의 나라인데, 이갈리아는 전통적인 남녀역할이 뒤바뀐 곳이다.
우선 이갈리아는 수산업에 의존하고 있다. 또한 모계사회라서 가족은 여자의 성을 따르고, 여자가 집안을 다스리고 돈을 벌어온다. 그의 남편은 집안일과 육아를 맡는다. 아기를 임신하고 낳는 것은 여자이기 때문에, 돌보는 일은 남자가 전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이 곳의 관습이다. 책의 줄거리는 한 장관(당연히 여자이다) 가족의 아들이 잠수부가 되기를 희망하면서 성평등을 위해 노력하는 이야기인데, 마지막에 그 아이가 이갈리아의 불평등을 고발하기 위해 ‘이갈리아의 딸들’과 똑같지만 성별만 바꾼 책을 쓴다. 현실을 미러링한 소설 속의 현실을 미러링한 소설인 셈이다.
이 소설에서 내가 눈여겨본 것은 소설 속의 언어와 그것들이 실제 현실에서 무엇을 나타내는지였다.
우선 man과 woman은 소설 속에서 각각 manwom과 wom으로 바뀐다. Woman 이라는 글자 속에 man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woman의 어원은 wimman(wiman)이다. 이것은 woman-man, 즉 ‘여성-사람’이라는 뜻으로, man이 ‘사람’으로 쓰인다. Wimman은 wifman이 변형된 것이다. Wifman은 ‘여성, 여성 하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여성, 아내’라는 의미인 wif와 ‘사람’인 man이 합쳐진 형태이다. 현실에서 ‘man’이나 ‘그’ 같은 말이 좁은 의미로는 남성을, 넓은 의미로 사람을 지칭하듯이, 소설에서 ‘wom’은 좁은 의미로 여성을, 넓은 의미로는 사람을 의미한다.
둘째로 이갈리아에서 남편은 주로 가사와 육아를 맡기 때문에 하우스바운드(housebound)라고 불린다. 말 그대로 집(house)에 묶여있는(bound) 사람이라는 말이다. 너무 노골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아내를 보고 ‘안주인’, 집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랑 무슨 차이가 있나 싶다.
셋째로 이갈리아의 남자들은 2차 성징이 오면 ‘페호’라는 것으로 성기를 감싸서 받치고 다녀야 한다. 착용하지 않으면 비난받고 이것 때문에 남성이 입을 잠수복을 만드는데도 차질이 생기지만, 이것은 패션 아이템으로 소비되며 최신 유행을 따른다. 이것은 현실의 브래지어와 대응된다. 사회는 브래지어를 하지 않으면 인대가 늘어나 위험하다는 거짓말로, 여성의 가슴을 보기 좋게 모양이 쳐지지 않도록 한다. 이것은 단순히 미적인 용도로 만들어진 것이다. 흉부에 철사를 두르고 있기 때문에 계속 입게 되면 체하거나 소화불량에 걸리는 사람들도 있다. 막상 하지 않으면 비난받는다. 셔츠 안에 입은 것이 보여도 비난받기 때문에 민소매를 덧입는다. 그러나 동시에 비치는 셔츠 안을 통해 보이는 패션 아이템으로 소비된다.
넷째로 이갈리아에서 남자가 여자와 결혼하면, 남자는 ‘부성보호’라는 것을 받는데, 이것은 남자가 갖는 혜택과 의무를 뜻한다. 의무로는 육아가 있고, 혜택으로는 생계보장이 있다. 현실에서 모성은 부성에 비해 과대평가되고 있다. 모성은 본능이라는 말로 여성의 육아를 정당화시키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부성은 본능이라는 말은 없지 않은가. 2016년 건강가정기본법 14234호가 일부 개정되었다. 개정 내용은 8조 2항의 ‘모성보호’가 ‘모ㆍ부성권 보호’로, 21조 2항의 ‘취업여성의 임신ㆍ출산ㆍ수유’를 ‘임신ㆍ출산ㆍ수유ㆍ육아’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아이를 더 잘 돌볼 수 있도록 세운 법이 ‘모성보호’를 위해서라니.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는 인식이 너무 뚜렷하지 않은가? 소설은 이것을 잘 비꼰다. ‘결국 아이를 키우는 것은 맨움이야.’
이 외에도 프로이트(프로이트는 심리성적이론을 주장했는데, 쉽게 말해 여자는 페니스가 없기 때문에 불안정하다고 했다.), 여자를 상품처럼 세워 놓고 남자에게 선택당하는 장면, 여성해방운동이 ‘극단적이고 여성 우월주의다’는 평가를 받는 것, 등 성차별적인 내용을 정말로 잘 반영했다.
흔히들 혐오표현이나 가사/육아노동 등 여성의 고충을 털어놓으면 공감하지 못하거나, 공감하는 척하면서 제대로 된 해결책을 안 내놓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 제일 효과적인 방식이 미러링이다. 그대로 갚아주는 것이다. 혐오엔 혐오로 싸우는 게 아니라 하지만, 그렇다면 좋은 말로 그만하라고 했을 때 왜 안 멈추었는가? 아마 작가가 지긋지긋하게 말 안 듣는 가부장적 사회에 한 방 먹여주고 싶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성애자 남자라면 한 번쯤 읽어봐야 할 소설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