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셀러에 올랐거나, 학업과 관련하여 읽게 되었다거나, 혹은 추천도서목록에 있었다는 등의 이유로 이 책을 접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이 책은 작년 초, 내가 페미니즘을 배워가던 중 '메갈'이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을 때 그 존재를 알 수 있었다. '메갈'이라는 단어는 '메갈리아'의 줄임말이며 지금은 없어진 한 사이트의 이름이다. 이는 디시인사이드라는 대형 커뮤니티의 한 분류였던 '메르스 갤러리'와 이 책의 제목 「이갈리아의 딸들」의 합성어이다. 메르스 갤러리에서 공공연하게 행해진 여성혐오에 대해 반발한 일부 여성 유저들은 「이갈리아의 딸들」의 세계관 속 남성보다 우월한 권력을 가진 여성들의 모습을 표방하였고, 이로 인해 '메갈리아'라는 사이트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페미니즘이 뜨거운 감자가 되고, 많은 여성들이 페미니즘을 접하게 되는 데에 있어서 이 '메갈'이라는 사이트의 존재는 가히 그 시작점과 다름이 없었기 때문에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나 또한 자연스럽게 그 존재를 인식하고 뒤이어 「이갈리아의 딸들」 또한 알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 페미니즘이 이렇게 알려질 수 있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미러링' 때문이라고 감히 말 할 수 있는데, 이는 남성들이 그 동안 행해왔던 여성혐오적 행동들을 주체와 대상만 바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미러링은 그 특성상 눈살 찌푸려지는 혐오적인 표현들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에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 반감을 일으킬 수 있었고, 또한 그만큼 자극적이기 때문에 미러링을 기반으로 한 페미니즘이 우리나라에서 핫 이슈가 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갈리아의 딸들」은 이러한 미러링을 사회 전체로 확대하여 우리에게 충격을 안겨줄 수 있는 책이다. 현실에서의 미러링은 인터넷에서 행해지는 여성혐오적인 표현들 등을 대상으로 하지만 이 책은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한 권력을 갖고 있는 이 사회 전체를 대상으로 한 미러링을 보여준다.
■ 이갈리아 사회, 현실 사회 전체에 대한 미러링으로 구성되다.
이 책 속의 모든 것은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조차 미러링으로 비틀며 독자들을 일깨워준다. 우선 이 사회 속 여성들은 움(wom)이라고 지칭되며 남성들은 맨움(manwom)이라고 지칭된다. 현실 속 남성은 man인 반면 여성은 그 파생어인 woman이라는 점부터 비틀기를 시작한 것이다. 또한 가슴이 쳐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유두를 가리기 위해 브래지어를 착용하는 현실 속 여성들과 달리 이갈리아 속 여성들은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을 뿐 아니라 편한 옷을 입고 자연스럽게 그들의 가슴을 드러내며 거리를 걸어다닌다. 반면 남성들, 즉 맨움들은 그들의 페니스를 받치기 위해 페호라는 옷을 받쳐 입어야 하며, 화려한 레이스가 달린 블라우스와 불편한 치마를 입고 다녀야 한다. 흔히 접할 수 있는 종교적 요소들조차 완벽하게 미러링이 되어 있는 바, 이갈리아인들은 하느님 어머니의 딸이라고 믿는 움(도나 제시카)의 가르침을 그들의 종교적 기초로 삼는다. 이렇게, 현실의 권력 구조와 완전히 반대로 되어 있는 이갈리아 사회에서 움들은 사회적 권력과 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맨움들은 움들의 하우스바운드(현실 속 '와이프' 개념)로서의 삶을 살거나 그 생물학적 특징으로 인해 매우 고된 노동을 맡을 뿐이다.
이갈리아 사회와 현실 사회에서 가장 다른 점이자, 작가의 상상력이 매우 뛰어나다고 여겨지는 점은 여성과 남성의 생물학적 특징에서 비롯되는 것들이다. 우리 사회의 여성들은 생물학적으로 남성들보다 더 약한 힘과 작은 체구를 가졌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보다 신체적으로 불리하다. 그 결과, 남성들은 힘으로 여성들을 억압하는 것이 가능하였으며, 이로 인해 남성과 여성 사이의 권력차는 더욱 클 수 밖에 없다. 또한 생리와 임신의 주체인 여성들은 새로운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며, 그 책임의 정도는 아이의 어머니가 확실하다는 이유 등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남성들보다 강요되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들은 원치 않은 임신을 하였을 때 부끄러워하고, 낙태를 감행하였을 때는 사회적 비난을 듣게 되는 반면 유전자 검사를 하지 않는 이상 확인되지 않는 아이의 아버지는 비난을 듣기는 커녕 아이와 그를 임신한 여성을 두고 협박을 하거나 도망을 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갈리아의 움과 맨움들 또한 생물학적 특징 자체는 현실과 같다. 그러나 그 차이에서 비롯되는 문화와 사회적 태도가 완전히 반대이다. 이갈리아 속 움들은 맨움들이 자신들보다 거대해지는 것을 경계하여 작고 뚱뚱한 맨움들을 사회적 미(美)로 여기며, 키가 크고 근육을 가진 맨움들은 열등한 존재로 여겨 고된 일을 시키고 사회적으로 대우해 주지 않는다. 또한 움들에게 월경은 자랑스러워해야 할 일이며, 출산 또한 탄생 궁전에서 화려한 의식을 치를 만큼 위대한 일로 여겨진다. 즉, 생명을 낳을 수 있는 것은 움들 뿐이며, 그녀들의 권력은 그녀들이 임신을 할 수 있다는 것에서부터 나온다. 반면 맨움들은 정자를 제공해주는 것 외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열등한 존재로 여겨진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의 진짜 아버지가 존재하더라도 아이의 어머니인 움이 다른 맨움을 하우스바운드로 선택할 경우, 진짜 아버지인 맨움은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신선한 점은 성관계를 맺을 때 움과 맨움들의 태도이다. 가장 사적인 관계를 맺을 때조차 움과 맨움 사이의 권력은 그대로 존재하기 때문에 맨움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삽입 섹스를 할 수 없다. 움들은 외음부의 자극을 통한 섹스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임신을 목적으로 할 경우에만 삽입섹스가 가능하며, 이 경우에도 맨움이 눕고, 움이 주도권을 쥐는 자세로 성관계를 맺는다. 맨움해방주의자인 페트로니우스의 어머니 루스 브램이 '움이 맨움 아래에 누운 상태에서 성관계를 갖을 수도 있다.'라고 하는 아들의 말에 기겁을 하며 그것은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면서, 성관계의 횟수조차 남성을 기준으로 하는 현실사회가 얼마나 기이한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러한 요소들은 생물학적 특징으로 인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들조차 결국 사회가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권력자들이 그 사회의 문화를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점을 보면서 현실 속 여성들은 새로운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에 대해 축복을 받긴 커녕, 숨고, 협박 당하고, 심지어는 낙태가 불법으로 여겨져 범죄자가 될 수도 있다는 암울한 현실에 대해 비참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 「이갈리아의 딸들」, 읽기 힘든 책
사실 이 소설의 전개 자체는 읽기 쉬운 문체로 되어 있고, 시간 순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읽는 것 자체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는 도중 책을 잠시 덮고 쉼호흡을 해야했던 이유는 이 책이 우리의 현실을 너무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내내 현실과 달리 남성이 억압받는다는 점에서 통쾌했다기 보다는 '맨움'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되었는데, 아마 그 이유는 이갈리아 사회 속 맨움이 우리 여성들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책 초중반부에, 맨움 페트로니우스는 바닷가 근처를 거닐다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 숲속에서 움 3명을 마주치게 되고 그들에게 강간 당한다. 그가 아직 학교도 졸업하지 않았을 때다. 그녀들보다 덩치도 작고 마른 그는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하지만 그를 강간한 움들은 볼 일을 끝내고 그를 조롱하며 사라진다. 정신을 차린 페트로니우스는 집으로 돌아가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 하지 않고 혼자 괴로워했지만, 페호가 사라진 것을 눈치 챈 어머니 루스 브램에게 사실대로 말한다. 성폭력의 피해자가 된 그에게 어머니가 한 대사는
보고하지 말자, 페트로니우스. 모두 잊자. 그게 더 나아. 왜냐하면, 더럽혀진 맨움을 누가 원하겠니? 이번에는 그냥 내버려두겠어. 그렇지만 이것 하나만은 분명해. 이제 더 이상 해 진 다음에 바닷가에 가선 안 돼!
당장 성폭행으로 인해 아들이 입은 상처보다, 장관의 아들이 부성보호를 받지 못할 것을 더 염려하며 성폭행의 원인을 마치 해가 진 후 바닷가에 간 페트로니우스의 탓으로 돌려버리는 그녀의 태도는 현실 속 사회면 기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이다. 또한 자신이 당한 일을 스스로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페트로니우스의 모습은 그가 남자이기 때문에 기이하게 다가왔으며 그와 동시에 더 현실 속 여성들의 비참한 모습을 더 강하게 보여주는 것 같았다. 가장 믿을 수 있는 존재인 부모에게조차 '그 일'을 잊을 것을 강요당하고, 자신의 탓이라고 세뇌당하는 페트로니우스와 우리의 여성들은 과연 누구를 믿으며,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페트로니우스의 불행은 안타깝게도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성장한 페트로니우스는 그로 메이도터라는 움을 사랑하는 듯 하다. 그러나 맨움해방주의자인 페트로니우스는 그로가 아이를 갖게 되었다는 소식에 기뻐할 수 없었으며, 부성보호를 받지 않길 원했다. 움인 그로는 당연히 맨움인 페트로니우스가 자신의 아이를 기르길 원했고, 이는 곧 페트로니우스의 삶이 없어짐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페트로니우스가 '당신을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라는 의사를 표현하자, 그로는 페트로니우스를 폭행하고 그는 바다에 떨어진다. 계속해서 육지로 올라오려는 페트로니우스에게 그로는 그녀의 손가락을 짓밟고 계속해서 잔인하게 조약돌을 던진다. 결국 페트로니우스가 기절하자, 그로는 집으로 그를 데려가고, 깨어난 페트로니우스에게 너를 잃는 것이 두려워서 그랬다며 사랑한다고, 자신을 원한다 말하라고 강요한다. 그녀에게 또 맞는 것이 두려운 페트로니우스가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말하는 장면은 그렇게 기이할 수가 없다.
사실 성에 관계없이, 사랑한다고 말함과 동시에 그 사랑하는 사람을 폭행하는 것은 정상적인 범주에서 이해할 수 없는 행위이다. '사랑해서 때렸다.'라는 말처럼 모순적인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로와 페트로니우스의 모습처럼 여성이 남성을 사랑한다 말하며 폭행하고, '너는 나에게 상처를 주었고 나는 너에게 실망을 했으니 때리는 것은 마땅하다.'라고 하는 모습을 나는 들어본 적도, 본 적도 없다. 반면 남성이 여성에게 데이트 폭력을 가하는 모습은 하루가 멀다하고 기사 속에서, 혹은 주위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움이 맨움을 폭행하는 이갈리아 사회가 기이하다고 생각된다면, 우리가 '남자는 여자한테 그럴 수도 있지' 라고 생각하면서, '여자가 남자한테 그러는게 말이 돼?' 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데이트 폭력의 가해자가 대부분 남성인 이 사회 또한 기이한 사회라는 것을 반드시 깨달아야 할 것이다.
■ 맨움해방주의자들은 팔루리안이다?
팔루리안은 이갈리아 사회에서 맨움 동성애자를 나타내는 말이다. 현실과 비슷하게 이갈리아 사람들 또한 동성애자들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으며 그 혐오의 정도는 움 동성애자보다 맨움 동성애자에게 더 심하게 나타난다. 맨움해방주의자로서 활동하던 페트로니우스는 자신이 그로를 진심으로 사랑하는지에 대해 고민하며, 그의 친구 발드리안과 함께 스스로 자신이 팔루리안인지에 대해 얘기한다. 그들은 게이 바에 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그곳에서 같은 맨움해방주의자인 노총각 올모스와 땅딸보 판당고가 서로를 사랑하는 팔루리안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게이바에서 취한 페트로니우스는 발드리안과 키스하며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페트로니우스가 게이바에서 발드리안과 키스하며 새로운 경험을 하고,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장면은 그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고 생각된다. 그는 그 사건 이전까지 자신이 그로와 관계를 맺을 때 진짜 자신을 찾게 된다고 생각했고, 움과 함께 있어야 맨움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게 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맨움 동성애자인 팔루리안은 있을 수 없는 존재이며 불완전한 존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발드리안과 키스를 하며 이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고 오히려 그를 원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을 통해 그는 맨움이 움 없이 그 자체로도 완전하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것은 맨움해방주의자로서의 페트로니우스가 그의 해방을 위해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으로 볼 수 있다.
페트로니우스가 맨움과 키스를 하며 맨움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한 걸음 더 나아가 깨달은 이 장면은 소설의 서사에 있어서 부자연스럽지 않고 또한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작가가 올모스와 판당고를 팔루리안으로 설정한 것 또한 이해할 수 있다. 생물학적 특징을 제외한 모든 점에서 맨움보다 우월한 권력을 가진 움들은 맨움들을 자신들과 같은 위치가 아닌, 그저 자신들의 성적 유희의 대상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그녀들이 맨움들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만약 그녀들이 맨움들을 진정으로 사랑했다면, 이러한 권력구조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을테니까. 작중에서도 움인 보솜비 교장과 배러스커리는 동성애자로 나오며, 움 스스로도 깨닫지 못했을 뿐 결국 움들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같은 움이다. 이를 깨닫게 된 올모스가 같은 맨움인 판당고와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은 그다지 부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한편으로 한 가지 우려되는 점은 작품 내에서 가장 대표적인 맨움해방주의자인 페트로니우스, 발드리안, 올모스, 판당고 4명을 모두 팔루리안으로 표현했다는 점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이 책은 사회 전체에 대한 미러링을 통해 읽는 이에게 자극과 충격을 주어 현실사회가 얼마나 성차별로 인해 부조리한지 깨닫게 해주기 때문에, 페미니즘 입문에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고, 어쩌면 틀린 생각일 수도 있지만 만약 페미니즘을 접해보지 않은 사람이 이 부분을 읽게 된다면, '맨움해방주의자들은 거의 다 팔루리안이다.'라고 인식하고 이에 대응하여 '페미니스트들도 거의 다 동성애자이다'라고 인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흔히 페미니즘을 인정하지 않고, 혐오하는 사람들은 '페미니즘은 남자에게 사랑받지 못한 여자들이나 하는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은 전부 남자를 혐오하는 레즈비언이다.' 라고 말하곤 한다. 물론 이는 반박할 가치도 없는 근거 없는 말이며,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동성애자를 지워버리려는 의도도 전혀 아니지만 페미니즘을 전혀 몰랐던 사람의 입장에서는 대표인물 4명 모두에게 동성애적 요소가 존재한다는 것이 앞서 말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하지 않다고 본다. 이는 내게 있어 아주 잘 만들어진 페미니즘 입문서라고 생각했던 이 책의 한 가지 아주 조금 아쉬운 점이라고 생각된다.
■ 맨움해방주의자들의 미래, 그리고 우리
소설의 후반부에서는 맨움해방주의자들의 활동이 주를 이룬다. 그들은 부조리한 움들의 권력에 맞서 페호를 불태우고, 축제에서 난동을 피우기도 하며 선거에 출마하기도 한다. 2부의 16장 『민주주의의 아들』은 1부 1장 『브램 장관과 그녀의 가족』의 내용과 똑같지만 성별만 반대로 되어있다. 이는 페트로니우스가 이갈리아 사회를 미러링하여 쓴 책으로, 이갈리아 사회 속 「이갈리아의 딸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맨움해방주의자들과 함께 이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이 책을 읽은 자신의 어머니 루스 브램과 논쟁을 벌이며 그들의 논쟁을 끝으로 이 책도 끝이 나게 된다. 이 부분을 읽으며 스스로도 놀란 점은, 『브램 장관과 그녀의 가족』 속 아들인 페트로니우스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꿈꾸지 못한다는 점은 이상하게 여겼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의 아들』 속 딸인 페트라가 같은 상황인 것은 자연스럽게 인지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동안 내가 얼마나 성차별적인 사회 속에서 그것이 자연스럽다고 세뇌당해왔는지 새삼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만약 누군가가 말하는 것처럼 정말 '요즘 시대'에는 성차별이 없다면, 나는 이 두 장 모두를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읽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페트로니우스와 그 동료들의 맨움해방운동은 앞으로 더 성과를 낼 것으로 예상한다. 책 속에 그들의 미래가 직접적으로 나와 있진 않지만, 적어도 맨움해방주의자들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언론사가 생기고, 권력자 움의 결정체인 루스 브램이 '자신이 권력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권력을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 유지하고 싶다'고 스스로 발언했다는 점에서 더 평등한 사회로의 작은 움직임을 엿볼 수 있다. 이갈리아 사회는 2018년 현재보다 훨씬 더 성차별적인 사회이기 때문에 아마 페트로니우스의 아들 혹은 손자 세대에서는 성별에 관계 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아지지 않았을까.
소설 속 사람들은 맨움해방주의자들의 주장을 주의깊게 듣지 않았고, 그들이 벌이는 논쟁과 시위 퍼포먼스 등을 그저 '이상한 사람들' 혹은 '부적응자', '비정상'으로 취급한다. 페미니즘도 마찬가지다. 드센 여성들은 옛날부터 '마녀사냥'을 당해왔고, 여성의 권리를 외쳐왔던 사람들은 항상 비난을 감수해야 했으며 '사회부적응자' 취급을 받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페미니즘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좋은 적이 없었다. 성 뿐만 아니라 모든 측면의 인권에 대한 의식수준이 높아진 지금은 당연히 과거에 비해 양성 간의 권력 차가 줄어들었으며, 페미니즘에 대한 의식 또한 예전보다 나아졌다. 그러나 여전히 대다수의 남성들은 자신이 권력을 갖고 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길 바라며, 심지어는 여성들조차 자신들이 권력의 피해자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페트로니우스를 포함한 맨움해방주의자들이 포기하지 않고 그들의 활동을 이어나간 것처럼 페미니즘도 그 명을 다하지 않고 계속해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나아갈 것이다. 그리고, 완전한 양성평등이 이루어지는 순간, 페미니즘은 재촉하지 않아도 스스로 그 자취를 감출 것이다.
브램과 페트로니우스의 마지막 논쟁에서 루스 브램의 마지막 말에 대해 이 책의 옮긴이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최근에 등장한 에코-페미니즘에서는 생테계의 파괴를 남성 지배와 연결시키고 있다. 자연/문명, 자아/타자, 남성/여성을 대립적인 것으로 개념화하는 남성적 인식 구조와 현대 사회의 위기가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주장은 여성학 내에서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남성이 지배하게 되면 인류는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브램의 말은 남성이 지배하는 세상에 대한 중요한 비판을 함축하고 있다.
'루스 브램의 말은 정도가 지나치다. 인류는 오래 전부터 남성에 의해 지배받아왔고, 남성적 인식 구조를 중심으로 사회는 돌아가지만 아직 생태계는 파괴되지 않았다. '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들은 움인 루스 브램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만약 루스 브램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들이 루스 브램과 같은 인간이 아니길 바란다. 루스 브램처럼 자신의 반려자가 아이를 돌봐야 하고, 자신의 시중을 들어야 하며, 자신이 원할 때만 자신과 성관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길 바란다. 그녀처럼 자신의 아들이 성폭행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명에를 우선시하여 자기 자식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아니길 바란다. 그녀처럼 자신이 권력자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뻔뻔스럽게 모두가 평등해지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이 아니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얼마 전, 여성의 나체 동영상을 불법 유출한 한 남성이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는 한 기사에 달린 댓글을 적으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만약 이 댓글을 보고 무언가 느끼는 바가 있다면, 「이갈리아의 딸들」을 읽는 것을 권하고 싶다.
"여성이 역차별을 받는 사회에 살고 싶다. 여성이 남성에게 수시로 성추행을 하기 때문에, 남성이 범죄의 주된 표적이 되기 때문에 남성전용주차장과 남성전용칸이 생겼으면 좋겠다. 남자꽃뱀에게 무고죄로 고소당하지 않게 조심해야 하고 여성이 생수통을 옮기고 데이트 비용을 전부 지불하는 역차별을 받는 사회에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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