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생각하는 자율성 내지 주체성은 과장되어 있는 부분이 많다. 과학자였던 리처드 파인만의 자서전에서는 학교에 방문한 최면술사에게 최면을 받았던 그의 일화가 나온다. 저항하고 싶으면서도 최면술사가 명령하는 대로 행동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파인만은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어, 단지 하고 싶지 않을 뿐이야' 라는 말이 실제로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다르게 표현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인간은 일어나서 잠들기까지 자신의 행동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지만, 인간이 오랜 세월동안 이루어진 진화의 일부라는 점을 고려해보면 그들의 행동이나 의사결정 중 상당부분은 미리 설계되어 있던 매뉴얼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 사람과 사랑에 빠진 이유를 수 만개씩 늘어놓지만 실상은 우수한 자손을 낳을 수 있을 것이라 판단되는 유전적 조합 그리고 극소량의 호르몬 작용일 뿐이다. 여성들이 분홍색을 좋아하는 이유는 사회적 통념을 넘어서서 선사시대에 나무 열매를 잘 찾도록 각막이 분홍색에 민감하게 발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부는 이러한 관점에 대해 거북한 반응을 보인다. 동물들과는 다른 존엄성을 지니고 있는 인간을 프로그래밍 된 수동적 개체로 보이게 만들어 마치 벌거벗은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자율성에 대한 자부심을 부정당한 인간은 이러한 사실을 애써 숨기고, 외면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가 사람들 사이에서 많은 사랑을 받음과 동시에 반감 또한 불러일으켰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단지 유전자대로 움직이는, 자율성을 상실한 개체일 뿐인가? 그렇지 않다. 진정한 자율성은 이전의 행동양식을 정확히 파악하고 수정해나가는 데에서 시작된다. 시험공부를 할 때 오답노트를 쓰는 것과 같은 이치다. 과거에 어떠한 행동을 하였는지 인식하는 것이 미래 행동의 근간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동물학적 관점의 인간행동은 인간의 자율성과 존엄성을 위해 거부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충분히 이해되고 수용되어야 한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대니얼 카너먼은 경제학자가 아닌 심리학자였다. 그는 인간의 행동방식을 기존 경제학과 다른 차원에서 접근했다. 그가 발견한 인간의 특성 중에는 '손실 혐오'가 있었다. 똑같은 600명을 놓고 '200명을 살린다'와 '400명을 죽인다'라는 문장이 결과적으로는 같은 것임에도 인간은 나중 문장에 대해 더욱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이에 따라 행동했다. 하지만 이러한 연구 내용에 대해 아는 사람은 다음부터 이러한 문장을 만났을 때 이성적으로 다시 한 번 생각할 기회를 얻을 것이고, 두 문장이 결과적으로 똑같은 것이라는 판단을 내릴 수 있다. 내 행동이 다른 요인에 의해 제어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수정하는 것, 나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율성의 획득이라고 보며, 동물과는 차별화된 인간의 존엄성이 확보되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우아하다. 우리의 행동이 사실을 지극히 동물적이고 원시적인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져서 벌거벗은 느낌이 들더라도, 부끄러움 때문에 그것에 대한 연구나 논의를 멈추어서는 안 된다. 인류가 달에 발자국을 찍은 지도 몇 십 년이 지났다. 이제 모든 사람들은 달이 황량하고 울퉁불퉁한 회색 돌덩이일 뿐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하늘에 뜬 보름달에 감탄하며, 가끔은 달에 살고 있을지도 모를 토끼와 선녀와 그 밖의 많은 것들을 생각한다. 단지 내 옆에 있는 이 사람과의 사랑이 먼지보다 적은 호르몬 때문이라고 해도 그 사람과 바라보는 달빛은 여전히 아름답고, 눈부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