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알은 보이지도 않게 깊이 박혔다. 마치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 소리 같았다.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살인으로 인해 법정에 선다. 왜 죽였냐는 질문에 그는 '태양 때문'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숨막히는 더위와 찌르는 듯한 햇빛에 주인공은 몽롱한 상태로 방아쇠를 당긴다. 행복한 오후의 완벽한 균형과 죽음같은 침묵을 깨뜨림을 통해 그는 타는 듯한 태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법정에 선 그는 살인행위 그 자체보다 어머니의 장례에서 슬퍼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더 많은 공격을 받는다. 장례식때 직원과 함께 담배를 피우고 밀크 커피를 마시고 다음날 애인과 희극 영화를 보았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경악한다. 슬프지 않냐는 질문에 그는 '엄마가 죽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사람들이 그에게 그렇게 분노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어머니를 사랑해야 하고 어머니의 죽음에 슬퍼해야 한다는 사회의 통념을 거부했기 때문일까. '사람이라면 마땅히 느껴야 할' 감정을 느끼지 않는 그에 대한 낯섦에서 비롯한 것일까. 결국 그는 교수형을 선고받는다.
그의 재판을 구경하러 온 군중 앞에서 그는 철저한 이방인이었다. 그는 사회적인 관습보다 스스로의 감정이 우선이었고 그 순간의 욕망에 충실했다. 그런 그를 사람들은 괴물 보듯 쳐다본다. 그가 만일 자신도 남들과 똑같은 인간임을 가장했다면 그는 죽음을 면할 수 있었을 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거듭되는 회유에도 자신의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변호사, 판사, 그리고 신부가 차례로 그를 찾아온다. 신을 믿지 않고 신에게 용서를 빌지도 않는 그의 모습에 그들은 혐오스럽다는 눈빛을 보내고 화를 내고 그를 불쌍한 사람 취급하며 설득한다. 그 모습은 흡사 예수를 세 번 부인하는 베드로를 연상시킨다. 차이점은 베드로는 스스로의 안위를 위해 믿음을 굽혔다는 것이고 뫼르소는 죽음을 거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이방인임을 자처하는 뫼르소에게 사람들은 사형 선고를 내린다.
자신의 목숨을 결정짓는 재판에서 그는 철저한 이방인이었다. 아무도 그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았고 변호인은 뫼르소를 대신해 열변을 토했다.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결국 그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오직 하나, 죽음 뿐이었다. 사형 집행일을 기다리는 그에게 신부가 찾아온다. 이 모든 시련을 혼자 겪어내지 말고 신에게 의지하라고, 나는 당신의 편이라고 회유하는 신부에게 뫼르소는 처음으로 격렬한 분노를 표출한다. 또 다시 이런 시련이 찾아온다면 그는 '지금과 똑같이 그 시련을 맞겠다'고 이야기한다. 그에게 분명한 것은 그가 죽는다는 것이며 그것은 다른 모든 사람도 마찬가지다. 신도, 다른 이들이 선택하는 인생도 결국 무의미하며 오직 '죽음'이라는 숙명만이 인간을 선택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죽음과 인생의 무의미를 마주한 그는 역설적이게도 그제서야 삶을 긍정하게 된다.
자신의 인생 전체에서 그는 철저한 이방인이었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보다 선택할 수 없는 것이 많았다. 다른 이들과 동일한 삶을 영위하고 동일한 감정을 느끼며 살아가기를 강요하는 사회에서 그는 언제나 타는듯한 목마름과 숨막히는 더위를 느꼈다. 그에게 사회는, 관습은 태양과 같은 것이었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도 사건이 일어났던 그 날의 해변에서도 그는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완벽한 질서와 침묵을 깨뜨리는 총소리는 결국 그에게 요구되는 모든 것에 대한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반항일 것이다. 그가 처음으로 그의 인생에서 주체가 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다. 그리고 그는 다가오는 자신의 죽음을 기꺼이 맞이한다.
처음 이 작품을 읽었을 때 '다름'이 정당한 처벌의 대상이 되는 사회에 대한 비판이라고 생각했다. 이 작품을 다시 읽으며 주목했던 것은 '소외'였다. 자신의 삶으로부터의 소외, 그리고 그를 극복하기 위한 살인, 그것은 타인에 대한 것이기도 했고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기도 했으며 그를 둘러싼 사회에 대한 것이기도 했다. 그의 방식이 옳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러나 객체로서 죽은 사람처럼 살아가는 삶을 거부하고 스스로의 신념과 죽음을 선택한 뫼르소를 '현대에 있어 유일한 그리스도'라고 지칭한 까뮈의 말이 조금은 이해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