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를 왜 벗어나려 하는가
오랜만에 통화한 친구가 “페이스북 끊었어.”라며 얘기했다. 시험기간에 SNS를 잠깐 하지 않는 사람들처럼 말하는 투는 아니었다. 살짝 놀란 나는 이유를 물었다. 친구는 “모두 행복해 보여서.”라며 답했다. 한숨 섞인 친구의 덤덤함은 한 가지 의문을 던져주었다. 왜 SNS에선 모두 행복할까?
다른 친구와 통화는 의문을 한층 강화해주었다. 여행을 가서 여자친구와 싸운 얘기를 했는데, SNS 글엔 행복한 사진만 있었다. 다툼은 SNS에 올리기 괜찮은 얘기가 아니다. 하지만 실컷 싸워놓고 행복한 척을 한다는 게 이해가 안 갔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니 그 친구는 내가 이해 안 간다는 투로 반응했다. 익숙하지만 불편한 것을 지적하면 항상 부정적 반응부터 튀어나오기 마련이니까. 도대체, 왜 SNS에선 모두 행복해야만 할까?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스냅챗까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시대다. 우리는 SNS를 활용해 자신을 드러낼 수 있고,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거대한 정보 홍수 속에서 원하는 정보를 취사선택할 수 있으며, SNS는 그 역할을 성실히 수행한다. 개인 방송은 콘텐츠 생산자가 욕망을 발현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렇듯 많은 사람들은 SNS를 활용하여 정체성을 드러낸다. SNS는 있는 그대로 현실을 반영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구체적 일상을 올린다. 그런데, 정말로 SNS가 있는 그대로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걸까? 현실은 행복과 불행이 섞인 곳이다. SNS가 현실 반영이고, 욕망을 발현해내는 장소라면, 행복한 모습만 보여줄 필요는 없다. 하지만, SNS에서 우리는 행복한 ‘나’만 보여준다. 행복한 모습이 곧 내 모습이라고 생각하여 자발적으로 선택한 걸까?
우리가 이 질문을 생각할 필요가 있는 이유는 SNS가 당분간 결코 망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SNS는 과거와는 질적으로 다르게 세계를 이어준다. 디지털카메라의 등장으로 사라진 코닥이나 페이스북의 등장으로 사라진 싸이월드가 각고의 노력을 해도 다시 옛날의 지위를 회복할 수 없었던 이유는 세계와 관계하는 방식이 질적으로 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SNS를 일시적이든 영구적이든 떠나려 한다. 완전히 새로운 기술인 SNS를 떠나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니?
사용자가 훨씬 많기에 떠나는 사람들이 가시적으로 보이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자. SNS에 불편함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그들은 습관적으로 SNS를 확인하는 일이 욕망을 해소하는 것이라 무의식적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SNS가 그 목적을 성취하는데 도움을 주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SNS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다.
SNS는 진정한 현실 반영인가
SNS에 올린 글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무조건 예쁘거나 배경이 잘 나온 사진을 선택하고, 그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물론, 못생기거나 이상한 사진을 올려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겉모습이 예뻐야 사람들이 사진에 관심을 가진다는 사진가의 말처럼 외양은 중요하다. 하지만, 사진가와 우리의 차이는 ‘철학’이다. 사진가는 사람들에게 철학을 얘기하기 위해 겉을 예쁘게 표현하지만, 우리는 겉모습이 ‘아름다움’, ‘멋짐’, ‘웃김’ 같은 사회의 바람직함에 적합한지만 판단한다. 프로필 사진, 음식 사진은 인간성, 가치관을 알려 주지 않는다. SNS에서 이루어지는 판단엔 ‘생각’이 없다.
첫 번째 예로, SNS엔 글이 없다. 글은 철학과 욕망의 반영이다. 하지만, A4 용지 한 쪽도 안 되는 글을 SNS에 올려도 사람들은 보지 않는다. SNS에서 사람들은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하는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왜 이렇게 기냐며 핀잔을 주기 일쑤다. 책으로 5분도 안 돼서 읽을 분량이 SNS에선 1시간이 걸리는 글처럼 포장된다. ‘생각’이 없는 세계는 정치적 판단(좋다 또는 나쁘다)이 쉬운 글을 선호한다. SNS에 글을 올리려면 내용을 압축하여 읽기 편해야 한다. 생각을 압축하는 게 능력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언어가 압축될 필요는 없다. 압축 압박은 SNS가 생각을 싫어한다는 걸 의미한다.
두 번째 예로, ‘좋아요’다. 콘텐츠를 보고 좋아요를 누르거나 댓글을 단다. 마음이 엄청나게 움직이면 콘텐츠를 공유하기도 한다. ‘좋아요’는 SNS에 생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증명하면서, 정치적 판단으로 SNS 세상을 구분하는 도구다. 외모지상주의를 반영이라도 하듯, 예쁘고 잘생긴 사진이 걸린 콘텐츠에 ‘좋아요’가 많다. 혐오나 웃음을 안겨주는 폭력적인 콘텐츠에도 ‘좋아요’가 많다. 이런 현상을 접하는 사용자들은 SNS 세상이 구분되어있다는 것을 학습한다. 학습 결과는 ‘좋아요’를 많이 받을 수 있는 콘텐츠 재생산으로 드러난다. 우리는 SNS에서 온전한 ‘나’의 욕망을 드러내지 못한다. 구분된 세상에서 내가 드러낼 수 있는 ‘나’는 제한될 수밖에 없다.
SNS를 잘 다루는 사람들은 욕망을 분출하는 공간으로 SNS를 이용한다. 좋아하는 걸 하면 잘할 수 있다고 했던가. 욕망을 분출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걸 열심히 했을 뿐이다. 하지만, SNS의 현실은 SNS를 잘 이용하고 있는 사람들의 철학을 얘기해주고 있지 않다. ‘현상’만 보고 역사적 통찰을 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우리는 ‘좋아요’를 많이 받는 콘텐츠만 보고 공간의 특성을 파악한다. ‘좋고 나쁜’ 기준이 정해진 재단된 세상에 ‘나’는 없다. 재단된 세상에서 나는 최대한 멋져야 하고, 예뻐야 하며, 발전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추상적 이념에 완벽은 성취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우리는 이념으로 재단된 세상에서 살기 위해 ‘Like’를 많이 받을 수 있는 콘텐츠를 선택한다. 우리가 콘텐츠를 선택한 것인가? 콘텐츠가 선택된 것인가? 우리가 예쁘고, 멋지다고 생각하는 건 사회가 정한 기준인가? 자아가 느끼는 것인가?
SNS를 '잘' 다루기
우리는 ‘좋아요’를 많이 받지 못하면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가 하고 있는 생각, 가지고 있는 모습은 전혀 긍정하지 않으면서 재단된 세상에 자신을 맞추려 한다. 사회 기준을 내면화한 우리는 의지가 부족해서 ‘가장 멋지고 예쁜’ 실체에 다가가지 못한 것이라 자책한다. 자책은 생각을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고, 성취할 수 없는 이념을 성취하도록 노력하게 한다. 이념은 현실과 SNS 정체성 사이의 자아 혼란을 가져온다.
SNS 정체성은 현실과 다를 수밖에 없다. 현실은 재단된 공간이 아니고, ‘나’ 역시 어떤 면에선 추레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부족한 사람이 절대 아니다. ‘부족’이 추상적 이념과 비교하는 맥락에서 사용되어선 안 된다. 옛날의 나와 비교해서 발전했는가를 판단해야지, ‘나’를 사회적 기준에 맞춰서 판단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우리는 항상 행복하지 않은 현실과 ‘좋아요’를 많이 받은 자신을 비교한다. 재단된 세계의 사진이 온전한 ‘나’를 드러내는가? 내가 먹은 음식이나 사진이 모든 기호를 알려주는가? 재단된 세계의 판단으로 현실의 나를 생각하지 말자. 그리고 ‘나’의 욕망으로 돌아가자.
욕망으로 돌아가기 위해 우리는 이념, 지식, 경험을 희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이념, 지식, 경험이 필요하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베이컨의 말처럼, 욕망의 자양분이 필요하다. 하지만, 사회가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것만 해서는 안 된다. 멋대로 해야 한다. 좋아하는 분야의 생각을 발전시키고, 하고 싶은 걸 해야 한다. 모든 경험과 지식은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를 파고들다 보면 자연스레 부족한 분야를 채우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욕망이 다른 긍정적인 욕망을 낳고, 긍정적인 욕망이 다른 긍정적인 욕망을 낳는 선순환이 이루어진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집중하는 사람은 자연스레 카리스마를 풍긴다.
우선 ‘공부’를 해야 한다. 공부는 지식 섭취를 의미하지 않는다. 지식 과다 섭취가 ‘나’의 욕망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면 된다. 이론을 가득 담아낸 전공서적은 현실을 반영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경제학 원론, 심리학 개론 같은 책은 필요한 지식을 뽑아서 체계화한 책이지, ‘지금, 여기’ 세계를 읽어내는 책은 아니다. 다시 말해, 이론서들은 구체적 일상을 반영하기엔 부족하다. 우리는 지식을 갖고 놀 수 있는 힘을 갖춰야 한다. SNS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하고, 인문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통찰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을 통찰하는 일은 아주 중요하다. 하지만, 통찰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해서 관심도 없는 인문학, 경제학 책을 읽는 행위는 바람직한 기준에 자신을 맞추는 일이다. 본인이 좋아하는 분야를 공부하다 보면, 자연스레 다른 분야를 공부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낄 것이다.
생각은 글로 쓰는 게 좋고, 대화를 하며 발전된다. 글을 쓰는 게 좋은 이유는 생각을 언어로 객관화하여 정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글을 쓰려 노력하다 보면 분명하게 생각이 정리된다. 대화는 고인 생각을 막아준다. 내가 배울 수 있는 사람과 생각을 나누며 긍정적인 가지를 뻗쳐나갈 수 있다. 존경할 만한 타인은 나의 긍정적 욕망의 선순환을 도와줄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자신의 생각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욕망으로 회귀하는데 어려움이 뒤따른다. 우리는 자양분을 쌓는 과정에서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기준과 싸워야 한다. 사회 관념은 욕망을 짓누르는 힘을 가지고 있다. 사회 관념이 우리를 짓누르려 할 때마다 훌륭함으로 나아가는 길은 끈기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탁월함으로 가는 과정은 지난한 평탄면을 포함한다. 평탄면을 잘 견디고 욕망에 집중한 사람은 수직 성장을 경험한다. 처음에는 자양분이 없기 때문에 평탄면이 길 수밖에 없다. 이 과정을 포기하면 우리는 재단된 세계로 다시 들어가게 된다. 욕망과 끈기에 집중해야 한다.
SNS를 잘 다루는 사람들로 다시 돌아가 보자. SNS를 잘 다루는 사람들이 인기가 많은 사람들은 결코 아니다. SNS를 잘 다루는 사람을 파악하기 위해선 그들과 얘기를 해봐야 한다. 인기가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SNS를 다루는지 철학을 들어봐야 한다. 다시 말해, 본인의 욕망을 SNS에서 분출하고, 현실과 자아에 혼란을 느끼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좋아요’를 많이 받는 사람들은 재단된 세계의 아이돌이지만, 구체적 세계를 잘 살지 못하고 있는 사람일 수 있다.
계속적으로 SNS와 나 사이 관계를 통찰해보는 일이 필요하지만, 정보의 홍수와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쉽지는 않은 일이다. 혼자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의지를 너무 신봉하는데, 의지 맹신은 현재 관점에서 미래를 과대평가하는 일이다. SNS에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보게 된다면, 비슷한 처지에 있는 친구와 함께 해결방안을 찾아보자. SNS처럼 사소한 일에 해결방안을 찾아보자는데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살면서 문제라고 느끼는 일은 아주 사소한 일이지 않을까?
일상적으로 겪는 일이라 생각하고 넘어가지 말자. 매번 반복되는 일상이 조금씩 자아와 SNS 사이 균열을 일으키고, 나를 옥죄는 사회 규범과 문화를 강화한다면 사소한 일이 아니다. 가장 경계해야 하고, 무섭게 생각해야 할 일이다. SNS를 잘 다루는 데는 기술도 필요하지만, 근본적인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 자신을 옭아매는 규범을 파악하고, 더 넓은 시야로 볼 필요가 있다. 노력하지 않으면 무슨 발전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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