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완독한지는 좀 지났지만, 미루고 미루다가 책을 덮은 지 거의 한 달이 다 된 지금 리뷰를 쓴다. 한 달이 지나서 이렇게 리뷰를 남기는 이유의 이 책은 단순히 읽음으로서 끝나지 않고 뭔가 나름대로 글을 남기고 싶어서, 그런 마음이 들게 하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이 책은 재미있다. 그리고 그렇게 재밌다는 점이 놀랍다. 서양 역사에서 암흑의 시기라고 불리는 중세, 그 중에서도 엄숙함의 최고봉이었던 수도원을 배경으로 하는 책인데도 나중에는 책을 다 읽어간다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재밌게 읽을 수 있었던 책이었다. 책이 그렇게 느껴지는 이유는 작가의 뛰어난 역량과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 덕분이기도 하지만, 중세 수도원이라고 해서 욕망이 아예 없는 성자들만이 사는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명시적으로는 금욕이나 절제 충직한 신앙과 순결을 강요받았기 때문에 그 속에서 살아갔던 인간들은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고 숨겨야만 했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생겨나는 자연스러운 욕망이나 감정까지도 숨겨야 하다 보니 오히려 나중에는 더 왜곡된 방식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었고, 이렇게 왜곡된 방식의 욕망이 표출되는 지점이 바로 이 책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부분이다.
이 책은 우선 윌리엄수도사와 그를 모시는 아드소가 수도원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의 범인을 알아내기 위해 수도원의 비밀을 파헤치는 추리소설, 모험소설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사실 그 안을 들여다보면, 이 책을 관통하는 더 큰 주제는 바로 서로 다른 세계관들의 충돌이다. 서양 중세라고 하면 단순히 기독교적인 세계관에 의해 지배되던 시대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 책은 사실 그 안에서도 성서의 해석과 교황, 황제의 역할을 둘러싼 굉장히 다양한 관점이 존재하던 시기였음을 보여준다.
첫 번째 세계관의 충돌은 황제파와 교황파 사이의 갈등이다. 이 것은 하늘의 뜻을 수호하는 교황과 지상의 권력을 지배하는 황제라는 두 존재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가에 대한 논쟁이었다. 황제파에 섰던 인물은 실존 인물이기도 한 체세나의 미켈레와 카파의 제롤라모였고, 이에 반격하는 교황파에서 이들과 논쟁하는 이들은 잔혹한 이단심문관인 베르나르 기, 베르트란도 델 포제토 추기경이었다. 이들의 논쟁은 권력의 주도권을 놓고 한 것이라는 점에서 정치적인 성격을 띠지만, 더 깊이 들어가보면 단순히 권력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서로 이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 자체에서 차이가 났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세계관의 충돌은 책의 결말 부분에서 윌리엄 수도사와 호르헤 수도사로 대표되는 웃음을 둘러싼 논쟁이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수도원의 원로격인 호르헤 수도사는 굉장히 엄격한 인물이다. 그는 웃음을 유발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수도사들 사이에서 읽히고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책에 맹독을 바르는 끔찍한 일을 저지른다. 그의 웃음에 대한 엄격함은 뒤로 갈수록 단순한 엄격함의 수준을 넘어선다. 마지막에 모든 것을 밝혀낸 윌리엄 수도사와 대면했을 때, 자신이 독을 바른 문제의 책을 한 장 한 장 뜯어 먹으면서까지 인간에게 웃음은 해악이라고 하는 장면은 종교적인 엄숙함에 대한 집착과 광기라고 밖에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반면 윌리엄 수도사는 인간에게는 웃음이 허용되어야 하며, 웃음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며 적절한 풍자는 오히려 의외의 진리를 들어내는 방식이라고 반박한다.
웃음을 둘러싼 두 인물의 논쟁은 두 인물이 표상하는 시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호르헤 수도사는 종교적인 엄숙함을 강요하는 암흑의 시대로서의 중세를 표상하는 인물이다. 그는 수도원에서 가장 오래되었으며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고 수도원의 모든 이들은 그의 눈치를 보며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검열하며 살아간다. 반면에 윌리엄 수도사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기를 표상하는 인물이다. 그는 수도사로서 다양한 언어와 신학에 박식할 뿐만이 아니라, 자연 과학을 공부하고 기술 분야에 대해서도 지식이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는 신 중심의 중세에서 점점 걸어 나와 인간의 이성과 지식에 눈을 뜨기 시작하는 르네상스 적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책에서 두 인물은 웃음이라는 하나의 소재를 둘러싸고 입장의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그러한 입장의 차이의 근원에는 두 인물이 상징하는 서로 다른 두 시대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결말에서 화제로 인해 수도원이 불타고 그 안에서 죽은 호르헤 수도사와 불길을 빠져나와 불타는 수도원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윌리엄 수도사의 모습은 점점 중세라는 시대가 저물고 르네상스와 근대로 향하는 유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좀 더 개인적인 감상평으로 넘어가서, 이 책은 나에게 단순히 재미있는 추리소설의 수준을 넘어서 굉장히 인상적으로 읽었던 책이고, 개인적으로 이런 책이야 말로 현대의 고전이라고 생각한다. 책의 서문에서 작가는 사실 이 책은 자신이 쓴 것이 아니라 자신이 우연히 중세 어느 수도사가 쓴 실제 수기를 발견하고 자신을 이것을 책으로 출간한 것일 뿐이라는 설정을 넣는데, 물론 말 그대로 이것은 설정일 뿐이다. <장미의 이름>이라는 책은 움베르트 에코라는 탁월한 거장의 작품이며, 서문의 설정은 책의 도입부에서 독자들이 흥미를 끌기 위한 설정일 뿐이다. 그러나 이 책이 그리는 중세라는 시대적 분위기와 수도원에 대한 묘사, 수많은 신학 책과 성서에 기반을 둔 수도사들의 대화와 그들의 신학적 해석을 둘러싼 논쟁의 치밀함은 정말로 그 당시에 벌어졌던 실제 사건을 보고 겪은 아드소 라는 관찰자가 있었고, 이 책은 실제 그가 남긴 역사적인 기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움베르트 에코라는 작가가 이런 책을 쓸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스스로가 실제로 역사학과 신학, 철학 등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며, 중세와 근대의 세계관을 이해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모국어인 이탈리아어와 라틴어뿐만이 같은 라틴어에 뿌리를 둔 프랑스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는 물론이고 영어, 독일어, 그리스어 러시아어까지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언어를 공부했다고 한다. 그가 <장미의 이름>이라는 현대의 고전을 쓸 수 있었던 이유에는 이처럼 많은 언어를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었던 것도 큰 몫을 했다고 생각한다. 덕분에 그는 수 백년전에 라틴어나 다른 언어로 쓰인 고전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장미의 이름>이라는 또 다른 고전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소설에서도 윌리엄 수도사가 ‘무릇 학문을 공부하는 자에게는 언어를 공부하는 것이 기본이거늘’하며 제자인 아드소를 꾸짖는 장면이 있는데...이 책을 읽으면서 굉장히 공감이 갔던 말이다. 그래서 책을 덮고 나서 그동안 배워볼 생각을 하지 않았던 언어를 하나 정해서 배워봐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고, 또 읽고 나서도 여운이 오래남았더 책이라,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아쉬운 마음마저 들었다. 좀 더 시간이 지나서 다시 한번 읽어보게 될 것 같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