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22일 목요일 버스 운전자들의 파업이 있었다. 다가올 대선에서 택시 운전자들의 표를 조금이라도 더 끌어 모으기 위해 한 정당에서 택시를 대중교통으로 만들겠다고 공약을 내걸었기 때문이다. 택시를 대중 교통화하게 되면 버스 운전사들을 비롯하여 서민들의 삶은 고달프게 된다. 때문에 이번 버스 노동자들의 파업은 자신들의 생계를 위해 자신들의 노동권을 지키기 위해 파업을 하고 잘못된 정책에 항거하는 것이었다.
전태일이 분신자살을 한지도 어느 덧 40여 년. 2012년 현재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일하는 곳의 환경 조건을 조금이라도 더 개선시키기 위해 당당히 자본가들에게 맞선다. 자신의 일터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자본가란 막강한 벽 앞을 마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40년 전과 지금이 과연 무슨 차이가 있는가? 전태일이 맞섰던 단단한 벽과 지금의 노동자들이 마주하고 있는 이 높은 벽의 높이가 달라졌는가?
'나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그가 자신의 몸을 다 받쳐 어둠을 환하게 밝히는 불꽃이 되어 세상에 외친 한 마디이다. 그의 죽음은 우리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진 않았을까? 아님 여전히 우리의 가슴 속에서 뛰고 있는가? 열악한 노동 조건에 항거하여 분신자살한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의 생애를 통해 현재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시작된 전태일과 나의 만남은 내가 가야할 길이 무엇인지,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이 옳은지에 대한 확신을 주었다.
1948년 8월 26일, 전태일은 경상북도 대구에서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제의 손아귀에서 막 벗어난 터라 사람들의 생활은 고달프기 그지없었다. 전태일의 집안도 가난을 빗겨나갈 수는 없었다. 그러나 전태일의 어린 시절, 솜씨 좋은 아버지 덕분에 가난에 찌들어 하루하루를 보내지는 않았다. 전태일의 아버지는 양복 재단사이셨다. 양복을 만드는 재주가 남들보다 뛰어났기 때문에 일감은 끊이지 않았다. 가난하고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도 온 식구가 하루하루 도란도란 살아가는 것.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이러한 생활도 오래가지는 못하였다. (전태일 재단 홈페이지 인용)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사람들에 치여 가면서 대구에서 부산으로 피난을 왔다. 한국 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을 와서 소규모로 양복 제조업을 하던 전태일의 아버지는 염색을 맡긴 원단이 잘못되는 바람에 빚더미에 앉고 말았다. 결국 전태일의 아버지는 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올 수밖에 없었다. 당시 돈도 아무것도 없이 떠도는 피난민들이 그나마 하루 일용할 양식을 구할 수 있는 곳은 서울이었다. 전태일의 아버지도 일단 가족들을 살려야 겠다는 생각 하나로 막연하게 서울로 올라왔을 것이었다. 그러나 서울에서의 생활은 만만하지가 않았다. 1954년, 전쟁이 휴전되자마자 도착한 서울이었지만 이미 폐허가 되어버린 한 나라의 수도에서 전태일의 가족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전태일의 가족처럼 무작정 서울로 올라온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에 전태일의 아버지는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 매우 힘들었다. 재봉 기술이 있었지만 취직하기가 어려웠고 평화시장이나 중부시장 등에서 그때그때 생기는 일거리를 해주고 몇 푼의 돈이나 벌을 수 있을 뿐이었다. 전태일의 아버지가 일자리를 찾아 서울 거리를 헤매고 있을 때, 전태일의 가족들은 서울역 앞 염천교 다리 밑에서 잠을 자며 만리동 일대를 돌아다니며 동냥으로 겨우겨우 입에 풀칠을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전태일 재단 홈페이지 인용)
1950~60년대. 모두가 가난에 허덕이고 얽매여서 살 수 밖에 없었던 그 시절. 모두가 비참하고 내일의 해가 빛날 거란 희망조차 가지지 못하는 날들 속에서 전태일의 가족도 찌들어져 갔다.
4.19 혁명 직전에 학생복을 단체로 주문받은 전태일의 아버지는 여러 군데에서 돈을 얻어 원단을 구입하고 제품을 만들어 납품을 했다. 하지만 곧바로 4.19 혁명이 일어나자 주문을 받아온 브로커가 중간에서 대금을 가지고 사라져버려 전태일의 아버지는 빚더미에 앉게 된다. 전태일의 아버지는 빛도 희망도 없는 나날 속에서 고통을 받으며 술을 마시게 되었고 술로써 현실을 벗어나고자 하였다. 술을 마시고 욕을 하고 전태일의 어머니에게 손찌검을 하고……. 아침에 눈 뜨면 지난밤의 일들을 후회하고는 했지만 되풀이되는 고통 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전태일의 부모님과 전태일, 그리고 그의 동생들 모두 아픈 시대의 쇠사슬에 묶여져 있었고 그 누구도 끊지 못하고 더 옥죄일 뿐이었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삶도 유지하지 못하는 그러한 일상 속에서 제정신인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술을 먹지 않으면 도저히 감당해낼 수 없을 것만 같은 답답함, 괴로움, 분노, 고통……. 물론 전태일의 아버지가 술을 먹고 부린 추태는 옳은 일은 아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차마 전태일의 아버지를 욕하지 못하였다. 술을 드시고 전태일의 어머니에게 몹쓸 짓을 하여도, 가족을 부양해야 할 책임감마저 버리고 술에 찌들어서 모든 걸 손아귀에서 놓아버렸을 때에도 차마 그를 원망할 수가 없었다. 술이라도 먹지 않으면 제정신으로 버틸 수가 없으니까……. 한치의 앞도 내다보이지 않는 힘든 세상에서 술만이 나를 위로해주고 모든 것을 잊을 수 있게 해주니까……. 그저 그가 안타깝고 그에게 미안함뿐이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겪으며 바닥까지 추락한 인생을 살아온 당신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이니까……. 자신에게 주어진 8식구의 눈앞에서 작아지는 자신이 너무나 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축 쳐진 그의 어깨를 보듬어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실업자인 아버지를 대신하여 장남인 전태일이 식구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신문팔이를 하다가 초등학교 4학년 때 학교를 중퇴하였고 노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11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그는 하고 싶었던 공부도 그만두었다. 11살 한창 부모님께 어리광도 부리고 친구들이랑 뛰어놀 나이가 아니던가? 어린 나이에 모든 것을 혼자서 감당하려는 전태일을 보며 나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내 나이 스무 살. 부모님과 고향을 뒤로 하고 학교를 위해 서울로 오게 되었다. 친척이 서울에 있다고 하나 학교 기숙사에서 살게 되어 찾아뵐 여유가 되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밤늦게 잠이 들 때까지 모든 것을 나 혼자 책임지고 감당해야만 하는 생활 속에서 점점 지쳐만 갔다. 물론 부모님께서 등록비에 용돈에 생활비까지 모든 것을 다 부담해주시나 하루하루를 혼자서 해내야 한다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집에서 통학하는 친구들을 바라보며 괜히 부러움이 앞섰다. 아직은 어리다고만 생각했다. 부모님께 어리광도 부리고 투정도 부리고만 싶었다. 받을 줄만 알았지만 정작 내가 부모님께 해드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부모님께 안부전화나 점심은 드셨는지 물어보는 문자 한 통마저도 하지 못했다. 나만 생각하고 나만 힘들다고 생각했었다. 11살의 전태일을 바라보며 내 모습이 너무 작아보였다. 부모님께 아무런 힘조차 되어드리지 못하고 늘 풍족하지 못함에 불만을 토로했었다. 이런 내가 부모님께서 내게 주시는 크나큰 사랑과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을까? 지난날 동안 내가 했던 불만과 투정의 말들을 주워 담고만 싶었다. 그리고 그 주운 말들을 곱게 빚어 부모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어린 전태일에게 희망의 소리를 들려주고만 싶었다.
1965년 전태일이 17살이 되었을 때, 그는 평화시장에 취직을 하게 된다. 시다로 취직했다가 1년 만에 미싱사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미싱사가 되었을 때 그는 평화시장의 실체를 비로소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 8,9세의 여자아이들이 빛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고 허리도 제대로 펼 수 없는 조그만 방에서 하루 종일 노동을 하는 현실. 자신의 고통을 넘어서 함께 일하는 이들의 고통마저도 보듬어 줄줄 아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가족들도 부양하고 자신이 하고 싶었던 공부를 계속할 수 있는 길이 있었지만, 전태일은 자신의 눈앞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평평한 길을 걸어가는 대신 전태일은 가시밭길을 택하였다. 인간에 대한 순수하고 여린 사랑과 연민을 지닌 전태일의 희생은 그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사회의 부조리에 저항하고 자본가에 맞서 당당히 소리칠 줄 아는 그의 모습에서 가슴 속 저 밑에서 무엇인가가 울컥 솟아올랐다.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귓가에서 울렸고 심장은 고동치게 만들었다. 그의 모습에서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 보였다.
어릴 적부터 내 꿈은 공무원이었다. 막연하게 공무원. 어른들이 정해준 그 꿈을 반드시 이루어야 겠다는 의무감에 얽매여 있었다. 그러나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 컴퓨터를 두드리고 서류에 사인을 하고 5시가 되면 칼같이 퇴근하는 일상 속에 갇히고 싶지 않았다. 늘 되풀이되어 하루하루 무뎌져 가서 나중에는 나의 본 모습마저 잃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가 다른 갈래로 방향을 바꾸었다. 이 부조리한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나의 목소리를 내고 싶다. 강자들이 쌓아 놓은 벽이 얼마나 단단하고 얼마나 높은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제 2의 전태일이, 제 3의 내가 어디에선가 똑같이 소리치고 있을 거라고 믿는다. 우리의 목소리가 강자들이 쌓아 놓은 벽 안 속까지 울려 퍼질 때 그 벽은 허물어질 것이고 비로소 전태일의 몸을 감싸 안았던 불길도 꺼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