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은 생전 500여권의 저작을 남겼다. 자판으로 글을 쓰는 현대인에게도 엄두도 못 낼 다작이다. 그의 책 대부분은 20년간의 유배생활동안 집필되었다. 제자들이 집필에 같이 힘써주었다곤 하지만 바깥에선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희망찬 미래를 생각할 수 없는 여건에서 정약용에게 글을 쓰게 한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정약용은 기울어져가는 조선을 어떻게든 일으켜보고자 노력했던 실학자였다. 실제 중앙관리로써 그에 대한 주위 사람들의 명성은 자자했다. 하지만 단지 천주교 신자였다는 이유로 박해를 꾸준히 받았고, 붕당정치의 과정에서 노론에게 화를 많이 입었다. 유배생활 후에도 그는 끝내 조정의 부름을 받지 못한다.
나라를 위하는 마음은 있으나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아팠을까. 목민심서 자서에 그는 이렇게 남겼다. ‘이 책을 심서라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목민할 마음은 있으나 몸소 실행할 수 없기 때문에 심서라 이름한 것이다.’ 유교에서 군자의 학문은 수신이 반이고, 나머지 반이 목민이라 한다. 경전을 공부함으로써 인격수양과 동시에 백성을 위해야만 군자라 불릴 수 있는 것이다. 밖으로 나가 백성을 위해 일할 수 없다는 자책감이 정약용으로 하여금 학문에 힘쓰고 제자를 양성하며 저서를 남기게 만든 것이다.
정약용은 유교경전을 재해석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무언가 사회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에 그는 백성을 중심으로 본래 유교의 뜻을 살리고자 했다. 그렇다고 한나라 이전의 유교에만 매달린 것은 아니다. 그는 시대의 흐름을 인정했다. 역사가 바뀐 것은 인정하고, 국가와 민의 관계를 재정립하려던 것으로 보인다. 민의 자율적 참정과 의사반영을 지지했다. 일례로 정약용이 곡산 부사로 부임하게 될 때 농민 이계심의 난이 일어난다. 정약용은 민중들의 삶을 힘들게 한다는 10여 개의 조항을 들고 찾아온 이계심을 보고는 그를 벌하고, 난을 진압하기보단 그 뜻에 동의하고 격려한다. 이는 유교 사회에서 상상하기 힘든 모습일 수 있으나 정약용은 이렇게 처신하는 것이 백성을 위한 유교라 믿었다.
정약용이 단지 과학기술과 천주교를 받아들였다고 해서 시대를 앞서간 사상가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이해관계에 너무 얽매이지 않고 세상을 볼 줄 알았다. 자신의 머리로 공부하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도르래의 원리에서 착안해 화성을 축조하고, 정전론을 구상하고, 조선이 4대 궁인을 보살피는 복지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은 남들도 그렇게 주장해서, 혹은 자신에게 이득이 되어서가 아니다. 그의 학문과 사상 밑에는 기본적으로 애민사상이 저류한다.
목민심서는 그 내용이 다분히 실무적인 조선시대 지방행정 지침서다. 그럼에도 왜 우리는 아직도 목민심서를 읽는가. 그 책 곳곳에는 정약용의 고뇌가 있다. 한 지식인이 그가 살아간 시대를 분석적으로 살피고, 그 강구책을 자신의 논리와 사실로 엮어내는지 볼 수 있다. 고전이 시대를 뛰어넘어 오늘날 독자들로 하여금 감명을 주는 책이라고 한다면, 목민심서는 두고두고 읽힐 고전이다.
이 책은 12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부는 6조로 엮었으니 총 72조이다. 목민심서라 하면 하나의 통권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죽편으로 48권이나 된다. 내용은 관직에 부임할 때부터 해관할 때 지녀야할 마음가짐은 어떠해야 할 것인지 윤리를 담기도 했으며, 지방의 습성은 어떠하며 행정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실무적 노하우를 담기도 한다. 각 조는 굉장히 많은 사례와 더불어 정약용 자신의 의견을 덧붙이는 형식으로 이루어져있다. 찾고 싶은 내용을 바로 검색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님에도 적절한 사례를 끝임 없이 생각해낼 수 있던 것은 그의 탁월한 독서량 덕택일 것이다.
이따금 그의 지식은 미래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와 쓴 책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전 분야에 걸쳐 해박하다. 일례로 배에 필요한 오동나무 기름을 어떻게 구할 것인가를 두고 그는 이렇게 썼다. “단지 그루 수만 보고하게 하고, 그 기름을 자기가 쓰든 팔든 관이 절대 간섭해서는 안 되며, 관에서 쓰고자 하면 값을 주고 사고 강제로 거두어들여서는 안 된다. 이같이 하지 않으면 날마다 채찍질하며 오동나무를 심으라고 해도 백성들은 심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정약용이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읽었던 사람이 아닌가 싶었다. 또 그는 어려운 공학지식을 글로 풀어내기도 했다. 정조가 중국의 면화씨를 뽑는 교거를 분석해서 똑같이 만들라고 하자 정약용은 찬찬히 살펴보며 그 원리를 밝힌다. “내가 그 교거를 보니 축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나무고 하나는 쇠이다. 쇠에는 가느다란 홈이 있고, 축 머리에는 나사가 없다. 굴리는 데에는 열십자 모양의 바람개비가 있어 사람이 의자 위에 앉아 손으로는 축의 자루를 돌리고 발로는 가로쐬기를 밟으면 열십자 모양의 바람개비가 대단히 세차게 돈다.”
시대에 너무 앞서 자기 뜻을 펼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어쩌면 정약용 선생도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을 원망하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대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해왔다. 그리고 그의 저작들은 당대 잘 쓰이지는 못하였으나 역사의 산실이 되었다. 역사학자 위당 정인보는 그를 이렇게 평했다. “다산선생 1인에 대한 요구는 곧 조선사의 연구요, 조선 근세사상의 연구요, 조선 심혼의 명예 내지 전조선 성쇠존망에 대한 연구” 정약용의 발자취만 따라가도 당시 조선을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