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로 무서운 건, 죽어서도 이대로일까 봐, 죽어서까지도 늘 이따위 신세일까 봐, 또다시 이 바닥으로만 떨어질까 봐 그게 너무 무서워.1)
고등학교 2학년 겨울이었다. 그 날의 나는 야자를 째고 교보문고로 놀러 갔고, 거기서 새빨간 책 한 권을 펼치게 된다. 책의 주인공은 2년제 대학에 다니는 여대생이었다. 꿈이 뭐냐는 질문에 “죽을 때까지 같이 술 마셔 주는 사람 하나만 있었으면 좋겠어2)”라고 답하는 그녀는 꿈도 희망도 없이 되는 대로 살아간다. 그러다 친구가 노래방에 부른 호스트 ‘제리’를 만나게 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물론 흔한 연애소설의 전개는 아니다. ‘제리’는 그녀와 본질적으로 같은 삶을 살아가는 남자애다. 그는 하다못해 호스트 중에서도 에이스는 정해져 있고 본인같이 타고난 게 없는 사람은 계속 바닥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다를 것 없는 둘은 같이 밤을 보내게 된다. ‘제리’를 만나기 전까지 주인공의 잠자리 상대는 전 남친 ‘강’이었는데, 사실 그것은 섹스라기보단 강간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녀는 차라리 고통만이 감흥 없는 본인의 삶을 잊게 해준단 생각에 ‘강’과의 섹스를 반복해왔다. 그때만이 현실을 이겨내는 유일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리’와의 관계는 그와 같지 않았다. 같은 처지의 둘이어서였을까. 그렇게 고양이들이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듯 그 둘은 관계를 지속해간다.
사실 이 소설은 텍스트만 보자면 예술보다는 외설에 가깝다. 하지만 책을 읽는 누구도 그 장면들이 야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슬프다면 또 모를까. 처음 이 책을 읽은 그 고등학생도 그러했다. 오히려 두려웠다. 이렇게 맨날 놀러 다니다 그런 현실을 마주하겠단 생각이 들어 책을 덮자마자 독서실에 갔을 정도였다. 새내기때 다시 읽었을 땐 잠시 극중인물들이 이해되지 않기도 했다. 그러나 4년도 더 지난 시점에서 또다시 읽어보니 제리, 그리고 주인공과 내가 무엇이 다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책의 주인공은 이름이 없었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누구도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고 얘기가 끝남을, 다시 읽었을 때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지점에서 누구나 같은 시기를 거친다는 작가의 메시지를 느꼈다. 모두들 한 번쯤 그런 시기를 겪지 아니한가. (성을 매수한다는 윤리적 논점을 피해 바라본다면 말이다.) 소설은 주인공이 수족관을 바라보면서 끝이 난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투명한 유리박스를 넘을 수 없는 물고기와 본인이 무엇이 다른가 생각을 하면서. 우린 모두 그런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누군가에겐 집안의 기대가 그럴 것이고, 타고난 신체적 한계가 그럴 것이며 사회가 요구하는 모든 것이 그런 자도 있을 것이다. 집안 사정 때문에 휴학하는 친구나 천재를 넘어서지 못하는 노력파 선배는 별로 낯설지가 않다. 대학에서의 지난 4년간, 난 그런 수많은 ‘제리’들을 만나왔다. 소설은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을 다른 방식으로 말했을 뿐이다. 또한, 어떤 것도 결론 내지 않은 채 맞이하는 엔딩의 방식 역시 '살아감'의 리얼리티를 드러내고 있다. 현실은 방정식이나 영화처럼 딱 떨어지지 못하다. 외려 삶은 끝이 없고 매번 구질구질하다. ‘기승전’만이 있으며 ‘결’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소설의 구성방식또한 그러하며, 그렇게 너무나 현실적이다.
그러나 이 잔인하리만치 사실적인 소설에서 나는 아픔보다는 연민과 위로를 느낀다. 바로 이 모든 이야기를 써 내려간 작가의 태도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미래와 노력은 사치일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는, 막막함의 필연을 아는 글을 읽으면서 나의 ‘제리’를 만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와 똑같은 이를 누가 미워할수있을까. ‘강’과 같은 남자를 사랑이라 믿고 만나던, 주인공마냥 남의 뜻에 적당히 몸을 맡기던 지난 시간들이 모두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나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나는 그 터널을 걸어왔다, 지난 일이다.’ 생각이 든다. 마치 ‘제리’를 만나고 나서야 이해하게 된 ‘강’의 심정처럼. 이것이 누군가에겐 충격적일 이 책이 내겐 위로인 이유이다.
1) 김혜나, <제리>, 민음사, 2010년, 214p
2) , 80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