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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중입니다
2018/01/21
제8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2017)
임현|최은미|김금희|백수린|강화길|최은영|천희란
문학동네
2017/04/07
2018-1-20
'제 8회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 (2017)'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은 활자 그득한 책보다 숫자와 친해야 했던 고등학생 때 처음 만났다.
기묘한 국어 선생님이 계셨다. 학교 공부보다도 작가나 철학가를 논하던 분이었다. 머리는 선선한 노란빛과 갈색빛의 가운데서 왁스로 기세좋게 정돈되어 있었는데, 아마 앞머리의 높이와 굳기 만큼이나 그 자존감과 자신감은 확고했다. 그리고 어린 학생의 마음에 끼치는 영향이야. 그 행동의 일부분씩 담습해가며 책과 빠르게 친해질 수 밖에 없었고, 젊은 작가들의 흔적은 그 즈음 독서 동아리에서 알게 되었다. 보다 고전적이고 한국 역사에 중요했던 문학들은 밀어두자. 배명훈이며 고백의제왕이며, 경제학과 출신 작가도 있구나, 김연수란 작가는 누구인가 이야기 했던 일들은 아직도 생생한 체험으로 소중히 남아있다.
출판 직후 5000원께 하는 이 단편집들은 매번 사회를 저렴하며 다르게 읽는 창으로 있어주었고, 아직도 연초에는 저기 혜화동 로터리에 있는 서점을 지나치며 올해의 이 작품집이 나왔는지 확인하곤 한다.
다른 이들에게도 소중한 수상집이 되기를 소망하며 추천부터 하고 독후감을 시작하고자 한다.
말해두건데, 사서 모아둘 가치가 있다.
2018년의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이 나오기 전까지 두근 거리는 마음을 가라 앉히고자 예전 책들로 눈을 돌려보자.
오늘의 담론은 비교론과 시대론, 두 단어로 생각해보고자 한다. 참고 텍스트는 2017년 8회의 대상 작품 '고두', 그리고 2014년 5회의 대상 작품 '상류엔 맹금류'이다. 물론 다른 글들도 주옥같이 소중하지만, 대상 선정에는 이유가 있겠거니. 그 이유도 마지막엔 같이 고찰해보고 싶다.
한 리뷰에 여러 책을 링크할 수 있었다면 보다 유용했겠지만, 미처 기능을 찾지 못했다. 오거서가 오래 지속되거든 언제고 추가해주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첫 대상은 황정은 작가의 '상류엔 맹금류'이다.
사람의 불행은 어디서 기인한다고 봐야할까. 정말 아득하기 그지 없는 질문이다. 무구한 철학자들이 답을 내리려 했지만, 논의는 아직까지 이어지는 것을 보니 명쾌한 답은 없었나 보다. 불행의 반대는 행복이라 칭한다면, 행복하게될 조건이 없다면 불행하려나?
그렇다면 행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들을 하나 둘 나열해보자. 근본적으로는 신체의 안전, 건강. 국가 단위로는 전쟁이 없으면 행복하지 않을까. 당장 먹고 살기에 넉넉할 만큼의 소득도 있어야 할테고. 물리적 조건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게 오늘 사회의 통설이다. 상호작용하는 사람도 하나 둘 있어야 할 것이다. 말이 안 통하면 만나도 답답하지 않을까? 좀 닮은 사람이면 좋겠다.
반대로 이런 것 중 하나라도 없다면, 사람은 불행한 것일까? 아니면 없음을 자각할 때서야 불행하게 되는 것일까?
황정은의 이 단편소설에서는 '내가 가지지 못한 행복의 요소들'을, 마냥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 남자친구의 가족을 보며 확인하게 된다. 타인의 결손을 보며 나도 가지지 않았는가 확인한다니, 이 얼마나 모호하고 불쌍한 일이련지.
제희의 부모님은 실향민이다. 전쟁 통에 내려오며 가족을 잃는 경험을 한 분들이기에, 그 어떤 상황에서건 가족간의 분리를 다시는 경험치 않으려 하는 분들이다. 그렇기에 거대한 빚을 지게 되어 어디로 도망을 치는건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다시 실향민의 처지가 되는 그 악독한 경험을 감내할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는 자살의 고민도 논점이 달라진다. '내 고통의 경감' 을 위해 자살을 고민하고 포기하는게 아닌, 온 가족이 확실하게 죽을 수 있는 방법이 없기에 자살을 포기한다. 이 철저한 가족주의의 시각에서, 부모님의 가장 큰 목적과 소망은 자식에 떳떳한 부모, 도망치지 않는 부모가 되는 것이었고 제희와 그 누나들은 그 대신 가난을 물려받게 되었다.
반면 이렇듯 꿋꿋히 뭉쳐온 가족이기에, '나'로서는 볼 수 없었던 가족간의 감정이 느껴진다. 암으로 인해 큰 수술을 겪은 아버지를 끌어안는 제희네 가족을 바라보며, '나'의 가족은 서로 저렇게 안아줄만큼 친하지 않음이 떠오르는 것이다. 제희를 만나고 가족과 같이 다니는 이유는 보다 명확해진다. 내가 가지지 못하고 받지 못한 저 애정을, 이 가족에 들어가며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감이다. '나'는 그렇기에, 제희가 부모님을 모시고 수목원에 가고자 하기에 같이 나선다.
그리고 수목원에서 일정은 험난하다. 그 애정을 느껴보기도 이전에, '나'의 경험은 덤덤한 서술로 이어진다. 무엇이 들었는지도 모를 거대한 짐을 여섯개나 꾸리고, 카트를 이고 지며 수목원을 돌아다닌다. 도중에 제희가 다쳤음에도, 돌아가거나 짐을 버리거나 할 여지는 없다. 아버지가 6 가족을 안고 가듯, 어머니가 6 가족을 안고 가듯 6개의 짐은 차마 버릴 수도, 덜어낼 수도 없는 존재로 작은 산책길을 방해한다. 결국 소기의 목적인 수목원 탐방이나 식물원이나, 식사는 다 해결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끝의 감정은 마냥 행복해보이는 장면은 아니다. 밥을 먹은 곳은 햇빛도 잘 들지 않고 질척이는 곳이었으며, 씻은 물은 맹금류 축사의 똥물이었고, 그런 궁핍한 상황은 제희네 가족의 삶을 너무도 생생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구성원 모두가 피로감을 느끼고 의욕도 사라진 채, 수목원 나들이는 끝이 난다.
제희 어머니의 한 마디가 아른거린다.
'내가 의지할 곳 없이 혼자 살아가는 게 너무 힘들어서 비슷한 처지의 남자를 이른 나이에 중신으로 만났다. '
그 기나긴 불행의 설명은 사실 여기서 기인한게 아닐까 두렵다. 정말 두렵다. 비슷한 처지의 남자를 만났을 때, 삶이 얼마나 바뀌냐에 대해 우리는 그 답을 예측가능하다. 안 바뀐다. 심지어는 더 안 좋아질 수도 있다. 둘 다 실향민이고 연고도 없으며 부를 일궈낼 것이 없다. 성실하고 그거면 된, 두 사람이 만난 것이다. 그렇게 한 명은 계원을 잘못 추천하여 집에 거대한 가난을 다시금 불러일으키고, 다른 한명은 암으로 인해 다시금 가족에게 짐을 지우며 남은 평생토록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그리고 자식을 끝까지 버리지 않고 떳떳히 키움에 행복을 느꼈다면 해피엔딩이겠지만, 우리는 그 엔딩 이후를 확인하고 있다. 제희의 어머니는 사랑을 못 받고 살았노라, 화를 낸다.
'나'는 아마 가족간의 유대감을 갈구하기보다, 자신과의 차이를 보다 자각한게 아니었을까. 이 단편은 '나'가 2년 전에 제희와 헤어지고 다른 남자와 살고 있음에도, 수목원의 기억과 제희의 가족에 소속되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끝을 맺는다. 마지막 문장은 여느 때보다 깊고 오해가 가득하다.
'나는 그날의 나들이에 관해서는 할말이 많다고 생각해왔다.'
'모두를 당혹스럽고 서글프게 만든 것은 내가 아니라고 말이다.'
'나'가 만약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계곡바닥에 신나게 돗자리를 깔았으면 모두에게 좋지 않았을까 자문을 한다. 그게 과연 모두에게 좋았던 일이었을까는 모호한 질문이다. 그 음침하고 질척이며 맹금류의 오물만이 누적되어오는 그 장소에서 신나게 밥을 먹는게 모두에게 좋은 경험이냐고? 아니지 않은가. 어찌 되었건 누군가는 상류에 맹금류의 축사가 있음을 알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걸 알게 된 사람은, 혼자 더 불행하느냐 같이 더 불행하느냐를 선택할 뿐이지 그 불쾌한 경험 자체는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실향민으로서 고난을 겪어온 제희 부모님의 삶이 쉬이 바뀌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 아닐까.
'나'의 이 기나긴 의문과 회한에 잠긴 기억은 기원이 분명하다. 내가 가지지 못한 가족간의 사랑을, 적어도 자식과 부모님간의 사랑을 비로소 제희네 가족을 보며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제희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타인의 가족을 보고서 비로서 허전함을 느끼고야 말았다.
마지막 장면에서 옆에 있는 남자가 어째서 제희가 아닌가 자문을 하는 것은 사실 비틀어진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보다 중요한 질문은, 왜 제희를 만났는가가 아닐까. 어째서 제희가 아닌가는 화자도, 작가도 답을 알 것이다. '나'와 비슷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 같이 사는 남자와도, 이 사람과 나의 차이가 느껴질 때 비로소 왜 이사람인가 질문을 골똘히 하게 된다.
우리는 어디서 행복을 얻는 것일까, 정말 모호하다.
사람들의 삶들에서 패턴을 관측하면 이런 말들은 줄곧 연상된다. 부부간엔 닮는다던가 그런 류의 말들이 있지 않던가. 사실 사람들은 행복함을 느끼기 이전에 허전함을 채우고자 비슷한 사람들을 찾아나서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만 채워지지는 무언가를 인식하면, 비슷한 사람들에 둘러쌓여 살아왔던 만큼 그 차이의 기억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불행은 아마 물이 있는 계곡의 정점에, 맹금류의 축사가 있었고 그 물이 똥물일 뿐임을 인지하며 찾아오는 것일게다. 아마 그들과 닮지 않은 '나'가 없었다면, 제희네 가족은 그 순간에는 정말 더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14년도의 작품은 여기까지만 짚어두고, 다시 17년 작으로 돌아오자.
임현 작가의 '고두'다. 풀면 머리를 조아리다, 용서를 구하다, 사과하다 정도 되겠다.
그렇다면 누가 누구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걸까.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를 하거나 양해를 구할 일은, 요즘 세상에 좀처럼 흔치 않다. 그리고 작가가 서술한 단편의 시점이 이 시대라면, 역시 마찬가지로 이런 일은 좀처럼 없을 것이다. 우리에겐 돈과 법이 있잖은가. 법에 따라 죄의 가치를 평가하고, 그에 따른 대가를 지불하는게 좀 더 보편화된 과정일 것이다. 사죄의 한자어를 풀면 죄를 갚다, 죄에 대해 사례하다 정도로 말이 될터인데, 그렇다면 오늘날은 사죄의 어원에 보다 근접하게 잘못에 대해 대처하고 있는 것이다.
단편상의 화자인 '나'는 15년께 교직을 한 사람으로, 항상 '마땅히 지켜야할 것을 지켜라며 강조한다. 그런데 핀트가 이상하다. 스승으로서 학생이 다치면 어디에 먼저 신경을 써야할까? 아니, 그 이전에 마땅히 생각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다른 선생님과 내기한 반 평균 성적이 떨어질까 고민한다. 물론 마냥 교직을 서는 분이 아니다. 이 도덕적인 질문에 대답하는 화자는, 윤리 선생님이다.
윤리 선생님이 생각하는 '사과'는 앞선 마땅히 하는 행동에서 보다 실리적인 행동으로 서술이 된다. 내가 얼마나 예의를 갖추었는지, 그 격조를 보여주는 말이고 형식적인 말이다. 수업시간에 무례하게 반응한 학생을 훈계하며, 되려 학생에게 바쁜데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는 윤리 선생님은 내면 서술이 없었다면 온화하고 여유 있는 선생님이 그려졌을지도 모른다. 윤리 선생님 치고는 지극히 행동과 양식에 초점을 맞추는데, 사실 윤리라는 과목 자체가 사람의 사회화와 관련된 것이라면, 이런 행동양식을 가르치는게 보다 적합하지 않았을까.
문제는, 그 무례했던 여학생 연주를 개인적으로 보다 알게되며, 그리고 통상 금지된 관계의 선을 넘으며 부터이다. 같이 다니는 일이 다른 교사에게 발각되며, 연주는 한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후일 '나'의 앞에 나타난 순간, 부른 배와 함께 교무실로 들어와 말을 건넨다. '죄송합니다. 선생님을 사랑하는 건 아무래도 잘못이니까.'
그 후 이 윤리 선생님이라는 존재는 추문과 추궁을 피해 떠나지만 다시 언제 연주가 나타나지 않을까, 사과를 하지 않을까 불안해 하게 된다. 그리고 최근에 발생한 학생 사건에서 그 흔적을 만나게 되는데, 더 서술하면 단편의 압축적인 서술을 미처 즐기지 못할 것 같기에
양보해두려 한다. 다만 마지막 윤리 선생님의 말은 공유해두자.
'얘야, 내 말 좀 들어보렴. 인간들이란 게 말이다, 원래 다들 이기적이거든. 태생적으로 그래. 처음부터 그냥 그렇게 생겨먹은 거린다.'
'그게 나라고 뭐 달랐겠니.'
윤리 선생님의 비도덕적인 행동을 하고, 그에 대해 고찰하는 설정은 생각보다 흔하긴 하다.
하지만 사과를 강조하는 윤리 선생님이, 끝내 사과를 하지 않고 자신의 과오에 끝내 변명을 하는 모습은 글쎄, 어딘가 처량 하기 까지하다. 대체 무엇에 대해 변명을 하냐면 그것도 쉬이 읽기 힘들다. 오롯히, 그게 나라고 뭐가 달랐겠니, 어쩔 수 없었단다를 반복할 뿐이다.
'나'의 사고관은 대저 무엇일까. 사람을 사랑하는 기색은 쉬이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연주를 안는 장면도 사랑했기 때문이나 신뢰라던가 눈빛 넘어로 무언가를 보았다거나, 그런게 아니다. 철저히, 어쩔 수 없었고 그럴 상황이었던 것이다. 작가가 윤리 선생님의 입을 빌려 담아낸 새로운 화두로 인해, 사과의 내용은 서사의 설명으로 바뀌고 개인의 의도는 사라져간다. 글을 읽으며 드는 불쾌한 감각은, 비도덕적인 행위를 해온 '나'에게 강제로 공감을 해야하는 글의 흐름에서 기인된다. 그럼에도 쉽게 인간이 약한 것이지, 너만의 잘못이 아니노라 쉬이 공감할 수는 없다. 사람이 이토록 상황에 의해 결정된다면, 사죄를 표해야 하는 대상과 주체는 과연 누가 되어야 타당한지 의문이 남기 때문이다.
이런 도덕적 질문에 대해, '나'가 생각하는 이익을 따지는 대개의 인간상은 윤리 선생님이 아닌 인간으로 답한다. 사과를 하는 행위는 그 의도보다 자세나 내용이 중요하고, 실제로 얻는 이익이 있기에 저 행위를 하는 것이라고. 사실 사과를 하는 행위가 대저 얼마나 큰 의미가 있나 생각해보자.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그 짧은 말로 만약 상대방이 용서를 해주지 않는다면, 저 의사를 표명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감정의 공유는 그로 인해 행동이 변화하기에 필요하고, 언어기법은 그렇기에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사과는 내가 받을 피해를 경감시키거나, 우월감을 주거나, 상대방을 파멸시킬 때 사용할 수 있는 기법일지도 모른다. 누군가 사과를 하러 다시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만큼은, 여느 두려움만큼이나 거대하고 무섭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찝찝하다. 윤리 선생님의 죄로 인한 심리적 갈등은 너무도 공허한 문장이기 때문이다. 사과 자체를 기법처럼 생각하는 이가, 이 내용을 자신의 아들에게 말하는 것 또한 공감받고자, 이해받고자, 책망을 덜고자 하는 감정없는 말로 비춰지기 쉽지 않을까? 이 고두는 누가 누구에게 마음을 전하는 것일까. 혹은 죄에 대해 응당 필요한 가치로 사례를 하는 것일까. 끝내 그 뒤는 알지못한채, 이 찝찝한 윤리관만을 남긴채 소설은 끝이 난다.
젊은 작가상의 단편들에 대해 어느정도 전달이 되었기를 바란다.
이 작품집의 의미를 논해본다면, 무수히 뽑아낼 수 있겠다.
한 소설집 안에서 제각기 다른 문체를 읽다보니 쉽게 질리지 않기도 하고, 보다 끌리는 작품을 찾기도 수월하다. 한 작가를 추적해도 매번 문체나 글 쓰는 습관이 변해가는걸 관찰하는 기쁨이 있다. 작가마다 식견이나 배경지식이 달라서, 설정들을 추적해가는 것도 쏠솔한 기쁨이다. 특히 과학적 지식을 결부시키는 작가분들, 존경한다.
가장 중요하고 큰 이유는 아무래도, 그 시대의 가장 큰 이슈를, 젊은 시각으로 보고 이를 또 소설로 체감할 수 있다.
생각보다 젊은 사람들이라 해도 사회 초년생에서 약간 더나아간 작가들이다보니, 여느 사회 이슈에 대해 관심이 많을 수 밖에 없나보다. 그래서 그 해에 과학적 발견이 많았다 싶으면 왠지 공상 단편이 좀 더 많이 실리고, 사회적 이슈가 너무나 크면 작품집 또한 거기에 관통되는 멋이 있다.
2017년 제 8회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은, 그렇기에 그 여느 때보다 사회적이다. 첫 대상 작품만 보더라도 윤리관, 사과. 우리는 지난 한해를 관통한 이슈가 뭔지 다 알지 않은가. 정당한 사과에 대한 부각은 우리의 의문을 만질 수 있는 대상으로 드러내어 주고, 반대로 사과하는 상대방에 대해 의심하게 해준다. 그리고 대상 이외에 작품들을 주욱 둘러보면, 여성 화자 뿐아닌 소설의 대상으로 여성이 강하게 부각됨을 확인 할 수 있다. 작가가 여성이거든 화자가 여성이 되기 쉬운 것은, 그리 난해한 작용은 아니다. 그러나 '고두'에서 연주와 같이, 사회적인 약자로서 대상이 되어간 여성들에 대해, 혹은 여성화자만이 전달할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해 해석한 소설들이 상당수 본 작품집에 들어와 있다.
2014년의 대상작은 반면 여성 작가, 여성 화자임에도 그 서술에 사회적 현상을 담아내지는 않는다. 사실, 글 자체에서는 보편적 선입관이 아니고서야 화자가 남자였어도 큰 차이는 없었지 싶을 정도다. 반면 사회 이슈를 담아내지 않는다고 소설이 약해지지 않고, 행복에 대해 고민케 해주고 그 뒷이야기를 기대하게 해주는 감사한 소설이라 생각한다.
아마 평가진들도 매번 고민을 하고 선정하겠지만, 이 젊은 작가들의 단편에는 언제고 항상 시대를 읊어내려는 시도가 담겨있는게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작품집하나에서 공동의 이슈가 나오기도, 흐려지기도 하며 해마다 다른 특성을 가져다 주기는 힘들 것이다. 문학길이 고단하다는 말을 줄곧 봐왔지만, 이렇듯 열심히 글을 써주는 이들이 있어 간간한 즐거움이 이어짐 또한 감사한 일이다. 쉬이 검열이랍시고 쳐내지 않고 담아내는 편집자들 또한 여건 고단한 일이 아니었을게다.
그렇게 이 작품집은 하나하나가 그 시대를 담아내는 훌륭한 장소로서 모습을 갖추었다. 그렇기에 하나를 사서 읽거든 또 하나, 다른 하나를 사모으게 될 것이라 감히 예언코자 한다. 1년전의, 2년전의 작가가 궁금하고 또 그 시대가 궁금해질 수 밖에 없거든. 참고로 말하지만, 연초에 확인하며 나오자 마자 사는 것을 다른 학생들에게 강하게 추천하다. 어디에서 판들 정가의 절반 가격이다.
유독 여느 때보다 책을 강조하는 것은 걱정과 노파심이 남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이 작가들의 글을 오늘 누가 또 찾아읽을까. 30세 초중반 즈음 되는 젊은 작가들의 단편에서, 유독 친근감이 갈수록 사라져 감은 느껴진다. 요새 향유하는 문화가 유독 느슨해지고 영상이나 사진이 많아지며 생기는 일인지는 몰라도, 웹툰이나 유튜브를 주로 보는 시대와 세대가 이 글들에서 과연 얼마나 젊음을 읽어낼 수 있으련지.
2018년의 젊은 작가상은 아마 보다 막중한 임무를 위임 받지 않았을까. 여느 문학상보다 건실하고, 시대상도 투영해야하며, 부디 불필요한 검열도 줄어가는 과정일 것이며, 이게 다음 세대의 문학이노라 보여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호흡이 짧아진 시대라 생각한다. 주마다 올라오는 웹툰으로 작품은 짧은 호흡으로 길게 반복해 내쉰다. 칙칙폭폭 칙칙폭폭 거리는 듯한 불협화음이, 산업시대 이후가 정보시대임을 입증하는 듯하다. 아니, 정보의 시대보다는 여느 때처럼 단숨에 몰아보고 단숨에 몰아 읽기 힘든, '할부의 시대'라 칭함이 맞을지도 모른다.
단편 소설은 그 짧은 호흡과 글을 단숨에 읽어나가야하는 긴 과정의 사이에서 오묘히 줄타기를 하는 시도가 아닐까. 여느 작업보다 이 서사를 압축하고 묘사해 나가는 과정에서 부담이 클거라 생각된다. 그 작가들의 기법과 일관된 서술을 찾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개인적으로 2017년 보다 2014년 작품집을 조심스레 추천해본다.
다음 새 모음집을 기다리며 생각해본다. 이런 기다림에 기인한 감정 또한 이토록 할부가 가능할까, 모순을 유지한채 다음 서사를 기다릴 수 있을까.
다음 젊은작가들에게, 다른 독자들께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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