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잔인한 제목이다. 지금껏 학교에서, 교회에서, 가정에서 무릇 생명이란 존엄하고 소중한 것이라고 배워왔는데 '죽여 마땅한' 사람들이라니. 이 책의 원제목인 'The Kind Worth Killing'을 살펴보면 저자는 people이 아니라 kind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책의 주인공인 릴리에게 '살아 마땅한 사람들'과 '죽여 마땅한 사람들'은 전혀 다른 두 부류로 인식된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는 듯하다.
01 릴리의 시선 책의 전반부는 릴리와 테드 두 사람의 이야기로 진행되다가 어느 순간 두 사람이 이야기가 하나로 합쳐진다. 그 후에는 점점 릴리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책에서는 직접적으로 밝히지 않았지만 릴리는 사이코패스다. 릴리의 유년시절을 살펴보면 릴리가 사이코패스가 된 것은 이상할 것도 없다. 릴리의 부모님은 '예술'이라는 이름의 자신들만의 세계의 빠져 릴리는 줄곧 철저히 방치되어왔다. 집 안에는 항상 각자의 '예술'에 빠진 수많은 사람들이 왔다갔다 했고 그 중 쳇의 존재는 릴리가 살인을 저지르는 첫 계기가 된다. 살인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을 지니고 있는 릴리는 위협과 상처를 주는 사람들을 '죽여 마땅한 사람들'로 분류한다. 그리고 그 범위가 점점 확대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고양이 '베스'를 공격한 길고양이에서 자신에게 신변의 위협을 가한 쳇으로, 쳇에서 자신에게 마음의 상처와 배신감을 안겨준 에릭 위시번으로, 에릭에서 자신과 같은 아픔을 지닌 테드의 아내 미란다까지.
이러한 릴리의 대담한 살인은 우리 모두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다. 우리의 마음 속에도 죽여 마땅한 사람이 하나쯤은 있기 때문이다. 그 어두운 욕망을 이성과 도덕으로 잘 감추고 있을 뿐이다. 과연 미움을 실행으로 옮긴 릴리만이 살인자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 마음속에 존재하는 은밀한 미움들은 드러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없던 것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용서'의 가치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용서는 나도 같은 죄인임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저 사람의 추한 모습이 사실은 나에게도 있음을, '그래도 내가 저 사람보다는 낫지'라고 생각하지만 그 추함의 정도가 사실은 판단하기 민망할 정도로 미세한 차이임을 깨닫게 될 때, 용서가 가능하게 된다. 그래서 용서는 결코 쉽지 않다.
마태복음 5: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02 릴리 부모님의 시선 이야기가 후반부로 향할 무렵, 왜 갑자기 릴리의 인생에 그닥 중요하지 않았던 릴리의 부모님이 릴리의 삶의 중심으로 들어오게 되었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책을 덮기 직전, 옮기이의 말을 읽고 무릎을 탁 치게 되었다.
이 소설은 의미심장한 아빠의 편지로 마무리된다. 릴리가 쳇과 브래드의 시신을 숨겨둔 작은 초원이 재개발된다는 소식은 과연 릴리의 범행이 온 세상에 밝혀지게 될지, 아니면 또 다른 범행을 낳게 될지 독자들의 상상력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결말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부분은 편지의 마지막 문장이다.
아빠는 널 사랑하고 앞으로도 언제나 그럴 거다. 무슨 일이 있든지 간에.
옮긴이는 과장된 해석일 수도 있다며 조심스럽게 부모님이 릴리가 저지른 일들을 알 수 도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지만, 나는 부모님이 모든 일을 알고 있으며 이미 릴리를 지키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고 감히 확신한다. 각자의 삶을 살던 부모님이 인생의 말미에 다시 합치게 된 것도, 고집을 버리고 릴리의 말을 고분고분 듣는 것도, 남의 일에 지극히 무관심하던 엄마가 갑자기 환경주의자가 된 것도, 무엇보다 여자밖에 모르던 아빠가 릴리에게 손수 편지를 써서 '사랑한다'고 표현하는 것도 모두 부모님이 릴리에게 용서를 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릴리가 아무런 양심의 가책없이 살인을 저지르기까지 부모로서의 역할을 전혀 해오지 않았던 릴리의 부모님이 이제와서 릴리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릴리의 범행을 아무말 없이 숨겨주는 것 뿐이었다.
이 책은 줄곧 나에게 '용서'를 말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 나의 아집을 버리고 용서해야 할 대상은 누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