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과의 대립, 취업, 미국으로 간 여자친구와의 관계 등으로 인해 항상 불안해하고 행복해하지 못하던 내가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읽은 이유는 도대체 저자가 전쟁통의 수용소에서 어떻게 생활했는지, 어떻게 그 시련을 이겨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이 책을 관통하는 문장은 저자가 작중에서 인용한 니체의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 빅터 프랭클은 우리가 왜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말해주지는 않았다. 작중에서는 삶의 의미를 어떻게 찾는지, 시련에 대한 좋은 태도, 시련에서의 낙관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말해준다.
빅터 프랭클은 유태인 의사로 아우슈비츠와 다카우 등의 수용소를 전전하며 3년을 보냈다. 어떻게 말로 그의 어려움을 표현할 수 있겠는가. 진지보수공사 등 가혹한 노동, 수프 한그릇과 빵쪼가리 하나가 전부인 빈약한 식사, 한치 틈도 없이 붙어서 자야할 정도로 빈약한 시설, 주변 친한 친구들의 죽음 등 상상조차 못할 일들이 그를 덮쳤다. 하지만 그는 살아남았다. 통계적으로 수용소에 들어간 사람 스물 여덟 명의 사람 중 한 사람만이 살아남았다고 한다. 빅터 프랭클이 살아남은 데에는 운이 좋다는 것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진짜 이유는 왜 자기가 살아야 하는지 찾아내었기 때문이다. 그는 수용소에 들어가는 첫날에 빼앗겨버린 자신의 작성하던 의학 서적의 원고를 마무리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아내의 실체를 느끼며 사랑을 느꼈고, 또한 수용소 내에서 조차 유머 등을 즐기며 삶의 의미를 찾아 결국 살아남았다.
우리는 왜 살고 있는가? 물론 우리는 저자가 겪은 것과 같이 극단적인 수용소 생활을 겪고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왜 살고 있는지 물어보면 단번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를 알 수 있을까? 저자는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사람들에게 스스로 창시한 로고테라피(의미치료)라는 이론을 설파하며 삶의 의미를 스스로에게 묻기보다는 외계와의 접촉(새로운 것을 창조,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 등)을 통해 반대로 삶의 의미를 찾으라고 한다. 이 말을 이론적으로는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경험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온갖 불안 때문에 밤잠을 설칠 때 그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것만으로는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지만 여자친구의 봄바람 같은 웃음을 만났을 때, 친구들과 운동을 할 때, 실제로 그 불안들에 대해서 찾아보고 마주할 때, 새로운 경험을 통해 하고 싶은 것들을 찾았을 때 나는 비로소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빅터 프랭클은 새로운 경험에 대한 중요성을 설파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성친구와 헤어진 사람들에게 새로운 일을 권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아닐까?
문제는 새로운 경험은 커녕 자신이 바꿀 수 없는 상황, 즉 시련에 노출되어 있을 때이다. 빅터 프랭클처럼 아무 자유도 없는 수용소에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빅터 프랭클은 로고테라피에서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결정하는 것만으로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수용소라는 큰 시련을 친구들과 농담을 통해 가볍게 다루기도 하고, 자신의 현 상황에 좌절하며 울기도 하고, 자신이 관리하는 병동의 환자들을 위해 탈출을 포기하기도 하면서 시련을 회피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시련을 마주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빅터 프랭클은 전쟁이 끝날 거라는 희망을 가지지도 않았고, 아내가 살아있다고 믿지도 않았다. 반면에 빅터 프랭클이 관리하던 환자 중 F는 3월 30일에 전쟁이 끝날거라는 꿈을 꾸고 믿게 되었지만, 3월 31일이 되자 죽게 된다. 근거 없는 믿음은 때로는 힘이 되지만 때로는 사람을 죽이는 무기가 되기도 한다. 나는 내가 힘들 때 주변 사람들이 나의 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 '잘될거야, 걱정하지마' 라는 말을 들은 경험이 많은데, 이 책을 읽고 나서 그런 류의 낙관적인 말들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게 되었고 앞으로 내 주변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빅터 프랭클은 실제로 주어진 시련과 마주하지 않고 단순히 믿거나 낙관해버리는 것을 경계한다.
저자는 이디쓰 와이스코프 조웰슨의 ‘오늘의 정신건강 철학은 반드시 행복해야 하며, 불행은 부적응의 징후라는 생각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가치체계가 불행하다는 생각 때문에 점점 더 불행해지면서 피할 수 없는 불행의 짐이 더욱 가중되는 상황을 만들어온 것이다.’ 라는 말을 인용하며 항상 행복해야 한다는 생각에 대해 경계하기도 한다. 나는 항상 행복하기를 바라왔다.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힘든 일들이 있을 때에는 그런 일들과 마주하기보다는 일을 회피해버린 적이 많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긍정적으로 여기기보다는 실제로 그런 일을 내가 객관적으로 정의하고 마주했다면, 내가 그때 회피했던 일들을 제대로 했더라면, 순간의 불편함을 감수했더라면 더 나은 삶을 영위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실제로 그런 식의 대처는 나에게 일시적인 편함을 남겨 주었을 뿐 결과적으로 행복함을 가져다 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삶은 결코 행복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행복은 삶의 의미를 좇으며 따라오는 결과와 같은 것이며, 불행이나 시련이 찾아오더라도 삶의 의미를 잊지 않으면,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는다면 계속해서 나아갈 힘을 얻을 수 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가족, 여자친구, 새로운 경험을 통한 내 정신세계의 확장,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인정, 선한 사람이 되기 등의 내 삶의 의미를 발견했고, 앞으로도 발견할 삶의 의미들과 더불어 계속 전진할 수 있을 버팀목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