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부터 수용소에서의 삶을 소재로 한 영화나 이야기 등을 매우 좋아했기에 주저함없이 읽어내려간 책이다.
줄거리는 작가가 겪은 죽음의 수용소(아우슈비츠 감옥)에서의 삶과 그에 대한 분석(정신과 의사의 관점)을 기본 토대로 하고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겪는 극심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하나하나 생생하고 자세하게 묘사해 나가며, 인간 본능에 대한 고찰과 좀 더 높은 수준(?)의 인간이 되기 위한 길을 열어줬다고 할까? 다 읽었을 때의 느낌은 '깨달을 것들이 아직도 많구나'라는 것이었으며 한동안은 정신적 충격과 혼란때문에 머리속이 공허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다.
군에서 처음 접했던 이 책은 어쩌면 아우슈비츠보다는 못하지만 사회 보다 많은 것이 제한된 곳에서 읽었기에 훨씬 더 공감이 갔던 것 같다.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깨달음은 소제목에도 있는 '시련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아래 내용은 책을 읽으면서 몸이 덜덜 떨릴정도로 전율이 왔던 내용이다.
-시련의 의미-
적극적인 삶은 인간에게 창조적인 일을 통해 가치를 실현할 기회를 주는데에 그 목적이 있다. 반면에 즐거움을 추구하는 소극적인 삶은 인간에게 아름다움과 예술, 혹은 자연을 체험함으로써 충족감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러나 창조와 즐거움 두가지가 거의 메말라있는 삶에도, 외부적인 힘에 의해 오로지 존재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지고의 도덕성을 요구하는 삶에도 목적은 있다. 물론 그에게는 창조적인 삶과 향락적인 삶도 모두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창조와 즐거움만이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곳에 삶의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시련이 주는 의미일 것이다. 시련은 운명과 죽음처럼 우리 삶의 빼놓을 수 없는 한 부분이다. 시련과 죽음 없이 인간의 삶은 완성될 수 없다. 사람이 자기 운명과 그에 따르는 시련을 받아들이는 과정, 다시 말해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과정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삶에 보다 깊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폭넓은 기회를 제공한다. 그 삶이 용감하고, 품위있고, 헌신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아니면 이와는 반대로 자기 보존을 위한 치열한 싸움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고 동물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 여기에 힘든 상황이 선물로 주는 도덕적 가치를 획득할 기회를 잡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선택권이 인간에게 주어져있다. 그리고 이 결정은 그가 자신의 시련을 가치있는것으로 만드느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결정이기도 하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中
사람은 창조적인 일과, 체험을 통해 즐거움을 얻는다.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뛰며 그 과정과 결과에서 즐거움을 얻거나 혹은, 문화, 예술, 자연 등을 체험하며 즐거움을 얻는다. 즉, 자신의 만족을 위한 삶을 통해 충족감을 얻는 것이다.
그렇다면 만족할 거리가 전혀 없는 삶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작가는 그것을 시련이 주는 의미라고 말한다. 창조적이고 향락적인 즐거움이 모두 제한된 삶 속에서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고 동물이 될지, 아니면 힘든 상황이 주는 도덕적 가치를 획득할 기회를 얻어 한차원 높은 고결한 인간이 될 지에 대한 기로에 서게 된다. 이는 인간 내면의 이성과 본능의 치열한 싸움이며, 누구도 개입할 수 없는 인간 자신의 선택에 달려있는 것이다. 즉, 인간이 시련이 가져다 주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는 없지만 그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권한이 주어지는 것이다..
최전방 GOP나 GP, 특전사 이런 분들에게 비할바 못되겠지만 나름 2년여의 군생활은 고통과 시련의 시간이었다. 하루하루 시간이 가기만을 바라며, 도대체 내가 왜 이 생활을 해야 하는지 수도 없이 고민하고 짜증내던 때에, 이 책을 보고 느낀 것이 많았다. 막연히 '고통을 즐겨라'라는 것이 아니라, 시련을 통해 성숙하고 고결한 인간이 된다면 그 자체가 바로 삶의 의미이며,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지고의 도덕성을 가진 초인은 어쩌면 현시대의 인간이 성장해 나가며 도달해야 할 과정중 하나가 아닐까? 죽음을 통해 인간이 완성된다는 말이 어쩌면 이해가 갈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