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do I have to live?
나는 왜 살아가고 있는 걸까?
오랫동안 간직한 꿈을 이루기 위해서? 가족과 친구들을 위해? 연인과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서? 맛있는 것 많이 먹고 재미있는 것, 좋은 곳도 보기 위해서?
당장에 떠오르는 이런 것들은 사실 좀 추상적이고 보편적이다. 누구나 그렇다고 말하기에, 아니 그렇다고 들었고, 그렇게 믿기에 순간적으로 물어봐도 나올 수 있는 것들.
난 정말 왜 살아가는 것일까?
요즘의 나는 살짝 숨이 막힐 정도로 바쁘다. 일반 수업시간보다 더 길게 스터디를 하고, 매일 사람들을 만나 단어시험을 보고, 오늘 발표될 영어성적에 마음조리고, 다음 주까지 닥친 과제는 언제 할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언제 만나고, 아르바이트도 해야 되는 데 그건 어떻게 하지, 읽고 싶은 책 영화는 언제 찾아보고, 며칠 후에 있을 친구의 생일은 어떻게 해야 할까 등등
주말까지 꽉 차 있는 스케줄에, 매일 아침마다 시끄럽게 울리는 폰 알람을 들으며 눈을 비비는 건 내가 스스로 만들어 놓은 수많은 일들이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살아가게 만들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들으면 웃기겠지만, 내가 오히려 생기 있는 때는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험기간이다. 이주 전부터 시험 계획을 세우고, 오늘은 전공과목을 공부하고, 내일은 요약본을 만들고, 세 번째로 공부한 걸 확인할 날은 이날에 하고, 하루의 계획에서 미루어지면 다음날은 잘 수 있는 시간이 그만큼 줄게 된다. 아직 시험기간도 아닌 걸 하고 술자리가 생기면 계획해 놓은 걸 할까, 놀러 갈까를 한참을 망설인다. 1,2학년 땐 당연히 노는 것이었지만, 요즘은 계획해놓은걸 안심할 때까지 마무리 하고 그래도 시간이 나면 뛰쳐나간다. 슬픈 현실이다.
나는 꿈을 가지고 있다. 아니 마지노선을 긋고 있다. 이 선을 그어 놓고, 이게 안 되면 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졸업을 하고, 원하는 대학원에 진학을 하고, 안정된 전문직으로 보장된 미래와 보호막 속에서 살아가는 것, 꿈이라기 보단 계획이다. 언젠가부터, 아니 내가 기억하는 한 아주 오래 전부터 나의 생각은 흑백논리 그 자체였다.
어렸을 때, 무언가를 잘 해 내면 칭찬을 받았다, 그게 깔끔하게 그린 그림이든, 백 점짜리 시험지든, 그 작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노는 것과 칭찬받을 만한 것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미 머리가 커진 지금도 그리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내가 정해놓은 계획대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선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었고, 이건 나 스스로를 구덩이에 밀어놓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심리학을 배우면서 나 스스로를 판단할 기회가 많다. 이 분야에도 저 분야에도 부정적인 성격에 대한 설명은 다 나다. 쉽게 슬퍼지고 고통 받으며 실망하는 그런 성격이 점점 더 심해져 요즘은 사실 폭발 지경이었다.
교수님께서 내 주신 책 목록 중 ‘죽음의 수용소’가 눈에 딱 들어왔다. 아우슈비츠는 그 먼 곳이 아닌, 내가 살고 있는 바로 이곳이라고 느끼고 있는 게 현재, 아니 아주 최근의 과거의 내 생각이었다.
내가 그리 생각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비웃을 지도 모르지만, 누가 봐도, 내가 즐겨본 수많은 영화와 소설에서 다룬 그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죽음은 사실 삶과 그리 멀지 않다. 신종 플루나, 칼을 휘두르는 강도는 무서워서 벌벌 떨지만, 교통사고를 당해서 즉사한다거나, 어느 날 잠들다 깨니 더 이상 그곳이 원래의 곳이 아니었다는 그런 것은 사실 그리 크게 느껴지진 않는다. 좀 더 분명히 말하면 고통은 무서워하되 고통이 결여된 죽음은 그리 두렵게 느끼지 않는다고 할까
저자도 말한다. 처음 수용소에 들어갔을 때 느낀 것은 충격이었으나, 무감각이 전신을 뒤엎고, 그토록 원하던 자유를 얻었을 때 찾아온 건 공허감이라고.
죽음에 대한 공포는 사람을 극한으로 몰게 한다. 나 역시 이런 서서히 찾아오는 불안감에 온몸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게 될 것이다. 사실 지금도 그렇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일시적인 삶, 계획된 대로 살아나간다 하지만, 내가 언제 이 허무를 이겨내고, 진정 나를 위한 성취를 위해 살아나갈지, 언제 내 삶이 끝을 맺을지 아무것도 정해진 건 없다.
저자가 말한 삶을 가장 고통으로 밀어 넣을 때는 삶의 목표와 간절한 시도가 좌절됐을 때 느껴지는 체념상태, 즉 더 이상 삶의 이유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일 것이다. 그가 정신과 의사로서 주창하는 로고테라피의 가장 큰 원리도 이것, 삶의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행복해야 할 이유,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아주는 것이다.
책을 읽고 난 후 절망감에, 허무감에 허덕이는 내가 왜 살아가야 하는지를 깊게 생각했다. 사실 지금도 고민하고 있지만, 모든 삶의 목표는 그가 말하듯 ‘사랑’임에 한층 더 공감하게 됐다.
술안주처럼 쉽게 질겅질겅 넘겨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닌, 그렇다고 너무 성스러워서 아무나 손을 못 대는 것이 아닌, 오로지 나를 위해, 내가 행복하기 위해, 또는 내가 행복할 수 있는 큼직큼직한 조각들을 찾아야 하는데 그 대부분의 형태가 사랑이다
상처가 나 고름이 나는데도, 채찍질해서 억지로 달리게 하는 현재의 나 같은 삶의 방식이 아니라, 약도 발라주고 같이 쉬어주고, 여유를 즐기며 함께 미래를 즐겁게 얘기할 수 있는 대상을 찾고, 그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난 이미 많은 사랑을 내 주변에 두고 있다. 그 동안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어쩜 내가 누려야 할 권리라고까지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 스스로, 대상에 대해서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아직 부족한 게 많고 갈 길이 멀다. 허나, 이렇게 글을 쓰고 나 자신에 대해 솔직히 말하며, 상황을 인정하고, 고쳐나가겠다는 의지 모두 나의 좀 더 행복한 미래와 사랑, 삶을 위한 큰 걸음걸음이 될 것이기에 마냥 불안하지만은 않다. 생각할 기회와 좀 더 뚜렷한 길을 알게 된 것 같아 말하기 힘들었을 테지만 자신의 경험을 허심탄회하게 기록해 놓은 작가와, 이 책을 추천해준 교수님께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