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5 나는 병적인 인간이다……. 나는 심술궂은 인간이다. 나는 남의 호감을 사지 못하는 인간이다.
『지하생활자의 수기』는 도스토예프스키 후기 문학의 개시를 알리는 무시무시한 작품이다. 자기 자신 외에는 모든 이를 미워하는 중년의 주인공이 비좁고 더러운 방에 혼자 앉아 정신적으로 자신을 학대하는 내용이 1부를 이룬다. 주인공은 언제나 최악을 향해서 몸부림치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절대로 최악이 될 수는 없음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잘나고 멋지고 싶은 욕구를 완전히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어딘가 망가져서 배배 꼬인 삶을 살아왔다. 고치고자 노력도 해보았다. 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과학과 이성이 무섭게 성장하며 사람은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고 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도시의 하늘을 가득 메우던 19세기였다. 2 곱하기 2는 4라는 진리가 지배이념으로 떠오르는 시절이다.
그는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2 곱하기 2는 물론 4가 맞지만 아무래도 부족하다. 인간이란 존재는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는 구제 불능이라서 자명한 진리를 아무리 설명해주어도 믿지 못하고 솟구치는 의심을 제어하질 못한다. 자신에게 아무런 이득을 주지 않는 아둔한 행동들을 거리낌 없이 해대고 쓰레기통에 파묻혀서 낄낄댈 수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논리다.
2 곱하기 2는 4라는 공식에는 인간의 의지가 들어있지 않다. 인간은 고통을 찬미하고 불행을 사랑하는 괴팍함을 간직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그놈의 자의식 때문이다. 다른 누구보다도 자신을 잘 알기에 스스로를 경멸할 수밖에 없는 자의식 말이다. 굴욕감에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흐르륵 떨어지는 눈물의 쾌감에 몸을 벌벌 떤다.
그는 지상에 사는 정상적인 사람들의 생을 부러워하지만 그들처럼 살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사실은 눈곱만큼은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하세계에서 홀로 외롭게 늙어가는 것보다 더 멋진 삶이 있을 거라는 기대를 품지만 그게 어떤 모습인지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 뻔뻔하게 헛소리나 늘어놓으며 살아간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옳겠지만 알다시피 인간이란 놈은 골치 아픈 법이잖은가. 심심해서 이런 글도 쓰는 것이다. 지상에는 진눈깨비가 내린다. 어제도 내렸고 오늘도 내린다. 진눈깨비 하면 떠오르는 일들이 있다. 그가 스물네 살 때의 일이다. 이 진눈깨비의 연상에서 나온 이야기가 2부를 이룬다.
그는 어느 날 당구장에서 사람들이 싸우는 모습을 구경하다가 길을 막고 있다는 이유로 키가 2미터나 되는 장교에게 들려서 창밖으로 던져진다. 그는 앙심을 품고 복수를 다짐한다. 그의 복수 방법은 단순했다. 장교는 산책을 자주 다녔는데 여기 자연스럽게 걸어가 어깨를 부딪치는 것이었다. 어깨를 부딪치는 것이 어째서 복수냐고 반문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대답은 턱없다. 다만 1부를 읽은 독자라면 이 어처구니없는 행동의 일말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실패하다가 결국 네프스키 거리의 어느 늦은 밤 기골이 장대한 장교와 어깨를 맞부딪치는데 성공한다. 장교는 그의 존재를 알아차리지도 못한 듯 보였고 부딪친 어깨는 무척이나 아팠으나 그는 신이 나서 킬킬댄다. 그러고는 집에 돌아와 형언할 수 없는 메스꺼움을 느낀다.
하루는 고독을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옛 동창 시모노프를 찾아간다. 그곳에서 또 다른 옛 동창인 즈베르코프의 송별회 소식을 듣는다. 2백명의 농노를 거느린 귀족 집안의 자제였던 즈베르코프를 그는 좋아하지 않았다. 가난한 농노의 자식이었던 그로서는 심한 열등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어릴 적 즈베르코프와 주먹을 교환한 일도 있다. 당연히 친한 사이였던 적은 한 번도 없다. 갑자기 뱃속에서 뒤틀린 심사가 일어 그는 송별회에 참석하겠노라 고한다. 시모노프는 탐탁지 않아 하면서도 오고 싶으면 오라고 말한다.
송별회 자리에서 그는 철저히 무시당한다. 무시당하면서도 자신 또한 다른 동창 친구들을 무시하려고 안달한다. 특히 즈베르코프를 겉멋만 든 채 여자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는 건달로 취급한 점 때문에 친구들과 시비가 붙는다. 결투 이야기까지 나오며 분위기는 험악해지지만 자리가 파할 때 쯤 되자 그는 갑자기 사과를 한다. 자신이 어째서 사과를 하고 있는 지도 모른 채 즈베르코프, 시모노프, 페르피치킨 모두에게 열과 성을 다해 사과한다. 물론 친구들이 사과를 받아줄 리 없다. 친구들은 2차 장소로 옮기고 가난했던 그는 따라갈 돈이 없어 시모노프에게 꿔달라고 부탁한다. 6루블을 꺼낸 시모노프는 갚지 않아도 된다며 이 돈을 받을 만큼 뻔뻔스럽다면 따라오라고 말한 뒤 나가버린다. 그는 돈을 받아 든 채 굴욕감에 몸서리치며 즈베르코프의 뺨따귀를 때려주겠노라 다짐한다.
친구들의 2차 장소는 여인들이 몸을 파는 곳이었다. 즈베르코프의 따귀를 때려주려 들어간 건물이었지만 어두운 조명 탓에 방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윤락가의 여인은 그를 손님으로 받는다. 그는 잠시 당황하지만 곧 여인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혐오감을 느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용무를 마치고도 그는 한참동안 여인 옆에 누워 있다가 문득 말을 건다. 여인은 보잘 것 없는 단 답으로 일관한다. 여인의 이름은 리자였다. 그는 되는 대로 지껄인다. 사랑과 슬픔 속에서도 인생은 계속되는 것이지만 여인이 일하는 이 곳은 시궁창이라고, 여기서 빠져나오라고 말이다. 말하는 도중에 그는 자신의 말에 도취된다. 갑자기 그는 지하세계의 사상을 전파해야겠다는 사명감에 불탄다.
p. 151 “이렇게 죽어가는 여자는 지하실 중에서도 제일 구석진 골방에다 처박아 두거든. 컴컴하고 축축하고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나는 골방에 말이야. 너는 거기 혼자 드러누워 무슨 생각을 할까? 마침내 숨이 넘어가면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달려들어 연신 투덜거리면서 시체를 처리하겠지. 너를 위해 기도를 올려줄 사람도 없거니와 한숨을 쉬는 사람도 없어. 다만 한시바삐 끌어낼 생각밖엔 없단 말이야. 싸구려 관을 사다가 어제 내가 본 그 불행한 여자처럼 재빨리 묘지로 운반하겠지. 그리고 너를 추모하는 뜻에서 한 잔씩 들이키려고 선술집으로 몰려가는 게 고작이야. 묘지는 질벅거리는데다가 진눈깨비까지 사정없어 퍼붓고...... 날씨인들 너를 위해 반드시 맑아야 한다는 법은 없을 테니까. ‘자, 그쪽부터 내려놓게, 바냐! 저런, 여기까지 와서도 거꾸로 떨어져 내려가는군. 밧줄을 좀 당기라니까!’ ‘뭐 이대로면 어떤가.’ ‘아니, 관이 옆으로 넘어지지 않았나. 이것도 인간인 것만은 틀림없으니 바로 눕혀야지...... 이젠 됐어. 흙을 덮게.’ 검푸르게 반죽이 된 흙으로 급히 구덩이를 메워버리기가 무섭게 다들 선술집으로 가버리지.......
이것으로 이 세상에서 너의 존재는 영영 없어져 버리는 거야. 다른 사람 같으면 아이들이나 부모님이나 남편이 무덤을 찾아주기라도 하겠지만, 너한텐 눈물 한 방울 흘려줄 사람도, 한숨 한 번 쉴 사람도, 너의 생시의 얘기를 해줄 사람도 없어. 너의 무덤을 찾아줄 사람은 이 넓은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단 말이야. 너의 이름은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져버리고...... 너라는 인간은 애당초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은 것같이 되어 버리는 거야! 묘지는 온통 질벅거리는 흙탕인데, 밤마다 사자가 일어날 시각이 되면 너는 관 뚜껑을 두드리면서 ‘여러분, 잠깐만이라도 좋으니 밝은 세상으로 내보내주시오! 나는 살고는 있었지만 진짜 생활이라는 걸 한 번도 해보지 못했습니다. 나의 일생은 걸레 조각처럼 혹사당한 끝에 센나야의 선술집에서 술과 함께 먹혀버렸답니다. 제발 여러분, 다시 한 번 밝은 세상에서 살게 해주십시오!’ 하고 울부짖고 싶은 심정일 거야.”
리자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경련을 일으키며 운다. 그는 자신이 만든 처절한 절망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무서운 공포를 느낀다. 그는 더듬거리며 그녀에게 자신의 집주소를 알려주며 혹시 일이 있으면 찾아오라 전한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는 가슴 깊이 후회한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멍청한 짓을 한 것이다. 특히 집주소를 알려준 것이 그를 괴롭혔다. 여인 앞에서는 무슨 대단한 현자인 마냥 잘난 소리를 지껄였으나 그녀가 그의 집에 찾아와 비참한 가난의 실상을 보게 되면 그 굴욕감은 견디기 힘들 것이란 생각이었다.
나흘이 지나고 어느 날 그녀가 찾아온다. 그들은 어색한 침묵의 시간을 보낸다. 느닷없이 그의 히스테리가 폭발한다. 자신은 벌레이며 벌레 중에서도 가장 사악하고 잔인한 벌레도 되지 못한 시기심에 사로잡힌 시시한 벌레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자신을 증오하는 말들을 쏟아내던 그는 문득 그녀의 동정을 느낀다. 그녀는 그를 꼭 안아준다. 그는 이 순간을 평생 추억한다. 일생일대의 가장 혐오스러운 순간으로 말이다. 나흘 전의 그 밤이 서로 위치만 바뀐 채 되풀이된 것이다. 한참 동안 그들은 껴안은 채 웅크리고 있다. 마음속에서 일어났던 격렬한 파도가 가라앉고 그는 그녀에게 정욕을 느끼며 달려든다.
일을 치른 후 당연하게도 그는 또다시 모멸감에 시달린다. 그녀는 사랑의 힘으로 그를 찾아온 것이다. 그는 이 사실이 지독하게 혐오스러웠다. 그는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낸다. 인사를 하고 떠나는 그녀에게 돈을 쥐어준 것이다. 하지만 잠시 후 그는 탁자위에서 그녀가 두고 간 구겨진 지폐를 발견하고 뛰쳐나와 그녀를 쫓는다. 그러나 멀리서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만을 바라본 채 뒤따라가 용서를 빌지는 못한다. 그에게는 무의미한 일이었다. 진눈깨비는 여전하게 날린다. 그는 우두커니 눈을 맞으며 서서 생각한다. 자신이 가한 모욕을 통해 그녀는 극심한 고통을 받을 것이고 자신을 증오함으로써 정화돼 보다 높은 곳을 선망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그는 이 에피소드까지 쓴 후 갑자기 참을 수 없는 불쾌함을 느낀다. 내가 이걸 왜 쓰고 있지? 그는 인간이길 거부하는 인간들에게 고한다. 자신이야말로 치졸하고 천박한 가장 인간적인 인간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