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사로 배우는 관료의 태도
흔히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그러나 역사적 사건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당대의 기록에 의존하고 <징비록>은
왜란을 해석하는 데 있어 중요한 원전으로 인정되는 기록이다. <징비록>이 고평가되는 이유에는 임진년 왜란 당시 전란에 대한 역사를 개인적 입장이 아닌 국정 요직을 차지하던 관료의
입장으로 국가적 차원에서 기술하려 노력했다는 점이 있다. 작자가 저서에서 당시 조선을 침범한 적국에
대해 왜놈, 왜국이라고 폄하하는 표현을 자제하려고 노력하며 일본이라는 국명을 분명히 서술하는 부분들에서
그의 객관성을 추구하는 태도가 드러난다. 또한, 그의 <징비록>은 일본의 침입의 신호로 해석할 수 있는 부분들을
애써 무시한 당시 조정의 태도 및 미리 전쟁을 대비하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을 담아 당시 조선의 문제점들과 조정을 비판하는 민심을 내용에 포함한
반성의 기록으로서 훗날 외국의 침범을 경계하고자 하는 명확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쓰여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제목
<징비록>의 ‘징비(懲毖)’ 역시 그런 의미에서 <시경>에서 따왔다고 작자는 밝히고 있다. 구체적으로 <시경>의 19권
주송에는 제목과 관련한 시가 담겨있다.
내가 당해 보았으니
이로 말미암아 훗날을 신중히 대비하리라
스스로 벌을 유인하지 말라
다만 쏘일 뿐이라
처음에는 뱁새라고 생각하고 있었더니
점점 큰 새가 되어 날아다니니
집안에 어려움이 많고 견디기 어려워서
나는 다시 초라한 바깥으로 나앉네
시를 인용하며 서애는 참혹한 전란의 경험을 통해 미래의 침략을 경계해야 함을 말한다. 외세를 가볍게 여기고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였던 것에 대한 그의 심경이 ‘징비’라는 내용에는 담겨 있던 것이다.
임진왜란사에 대해서는 정규교육을 거친 국민이라면 누구나 들어보았고 대충이라도 내용을 알고 있다. 전쟁 마지막에 대한 평가가 늘 ‘이로 인해 백성들은 고단함 속에
살았다.’, ‘몇 명의 군사가 희생되었고, 국토의 30%에 해당하는 농지가 불타 복구에 오랜 기간이 소요되었다.’라는
등의 구절로 마무리되듯 전쟁이 한 나라의 땅에서 벌어졌을 때, 특히 그 국가의 국력이 충분치 않다면, 그 결과는 더욱 참혹하다. <징비록>에는 왕을 보위해 국가를 관리했던 서애의 전쟁에 대한 심경이 가득하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하지만 실수로 인한 실패로부터 배운다. 실패를 학습하는 과정에서 잘못된 부분과 개선할
점을 파악하고 수정해나가는 부분은 중요한 작업이 되며 철저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는 관성처럼 작용해
후에 또다른 실패를 낳기도 한다. 류성룡의 지위를 고려하면, 그
실패의 무게는 개인의 실패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렇기 떄문에 그의 반성에는 국가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왕을 천도하게 한 데에 대한 자책과 스스로와 적국, 나태했던 조정에
대한 분노, 백성들에 대한 미안함 등의 복잡한 감정이 혼재되어 나타난다. <징비록>이 실제 당시 상황에서 어떻게 해석되어 조정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차치하더라도 관료로서 그의 태도는 따뜻함이 느껴진다. 물론 저서의 내용에서
다소 자신의 업적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명과 왕에 대한 사대부적 존중심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부분들이
있지만 오늘날의 정치에 대입했을 때, 충분히 배울 점이 많이 보이는 인물이라고 생각된다. 그가 자신의 경험을 객관화하고 바라봤던 것처럼 나도 내 스스로 철저하게 반성한 적이 있었는지 과거를 되돌아보게 되었으며, 서애의 반성처럼 현대 정치에서도 정치인들이 당파성을 뛰어넘어 관료로서 개인의 활동들에 잘못된 부분들이 없었는지 돌아봤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품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