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 요나스 요나손 /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09(2013) / 508쪽
오베라는 남자 / 프레드릭 베크만 / 최민우 옮김 / 다산책방 / 2015 / 452쪽
스웨덴에서 반년 넘게 살고 있는데 동화 외에는 스웨덴 소설을 하나도 읽어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고 시립도서관에 갔다. 기대는 전혀 하지 않았건만 각 나라 언어 서가에 한국어책도 있었다. 반가운 고민 끝에 내가 고른 것은 한국에서 요 근래에 주목받았던 두 권의 스웨덴 소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이하 『창문』)과 『오베라는 남자』. 두 권은 인터파크도서에서 집계한 2012~2017 5년 간 가장 많이 팔린 외국 소설 통계에서 각각 3위 7위를 차지하고 있는 책이다. 범상치 않은 할아버지들이 나오는 표지까지도 비슷한 이 소설들이 어떻게 한국 독자들을 매료했을까. 어떤 차이가 이들을 더 주목받고 덜 주목받게 만들었을까. 이 리뷰는 '스웨덴 소설'이라는 틀을 구성하는 이들 소설의 공통적인 특징과 각각 두드러지는 차이점을 탐구하기 위해 쓰였다.
일단 이들 소설의 주인공을 보자. 『창문』의 알란은 소설이 시작할 때부터 이미 100살이다. 소설은 이 노인이 자신의 100번째 생일파티 날 요양원을 빠져나오는 것에서 출발한다. 『오베라는 남자』의 오베는 알란보다는 나이가 적지만 59세, 여전히 작가와 대부분의 독자보다 나이가 많다. 스웨덴은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이미 18%를 넘은, EU에서 80세 이상 인구가 두번째로 많은 노령사회다. 인구의 5명 중 하나가 노인인데 이들이 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물론 소설은 이들의 현재 모습만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과거의 궤적을 밟는데 더 집중한다. 이들이 살아온 이야기는 한 권의 소설이 아쉬울만큼 파란만장하기 때문이다. 두 소설에서 노인 주인공들은 한 개인으로 취급되어 여타 소설의 주인공들과 비슷하게 갈등과 해소의 과정을 겪는다. 여기서 우리는 개인이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알란과 오베 모두 배우자나 자식 없이 혼자 살고 있다. 이는 전세계적으로 모든 노인의 겪고 있는 추세다. 그러나 스웨덴의 노인들은 뿌리깊은 사회 보장의 제도 안에서 자기만의 제2막을 누리는 데에 익숙하다. 평균 은퇴 나이 64세에 연금을 받기 시작해 각종 주거, 의료, 취미 활동이 지원되는 사회에서라면 나이가 들어감이 꼭 불안과 무력함의 증가를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존심 세고 자기 결정이 뚜렷한 스웨덴 소설의 노인 캐릭터는 그러한 사회적 특성을 반영한 듯하다. 반면 한국에서 노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소설을 보자. 박완서, <어머니의 말뚝>, 혹은 신경숙 <엄마를 부탁해> 등 화자가 꼭 노인 본인은 아니지만 화자의 부모가 주인공인 소설이 머너 떠오른다. 적나라한 현실의 반영일까. 한국 소설에서 노인은 대게 가족에게 의존해 점차 짐이 되어가는 인물, 인생의 무대에서 씁쓸히 퇴장하는 인물이다. 혹은 박범신 <은교>에서처럼 노인에게 부여되는 금기, 세대 갈등 등도 흔한 소재다. 흥미로웠던 것은 『창문』과 『오베라는 남자』 둘 다 세대 갈등이 두드러지지게 나타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고지식한 오베가 젊은층을 이해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불평한다던가, 오베의 친구 루네 부부가 자식들을 미국에 보내고 무관심 속에서 살아가는 설정은 세대 갈등의 한 양상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오베 역시 소설이 진행되면서 다양한 성격의 젊은이들을 내적으로 받아들인다. 아예 젊은이들과 처음부터 크루를 만들어 모험을 떠난 알란은 말할 것도 없다. 소설들은 역동적인 서사와 주인공에게 부여되는 특별한 성격을 위해 노인 캐릭터를 사용한 거지 어떤 노인 문제를 고발하는데 주목하진 않은 것 같다. 어쩌면 이러한 가벼운 접근이 현대 독자들을 끌어당기는 힘이 됐던 걸지도. 게다가, 이들 노인들은 '귀엽다'. 지나가는 사람이 무턱대고 맡긴 트렁크를 얼떨결에 훔쳐버리거나 시체에서 신발을 벗겨 자신의 슬리퍼와 바꾸는 알란, 혹은 주변인들에게 까칠하게 굴려 하지만 마음처럼 잘 되지 않는 오베를 보고 있으면 이렇게 귀여운 노인 캐릭터들을 한국 소설에서 본 적이 있나 생각이 든다. 노인층을 바라보는 그런 새로움 또한 독자에게 영향을 미쳤으리라.
그러나 사실 두 소설은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 더 크다. '노인'이라는 카테고리로 억지스럽게 묶었지만 알란과 오베 두 사람의 나이 차는 41세. 성격도 두 사람은 딴 판이다. 알란은 재미 없이는 세상 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한 세기 동안 끊임없이 직업과 정체를 바꾸어가며 세계 도처에서 각종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 그에게는 변화가 오히려 일상이다. 그가 탈출을 감행한 이유도 양로원에 가만히 앉아서 죽는 것보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삶이 더 재밌겠다 싶어서다. 반면 오베는 각종 다양한 방법으로 소설 내내 죽기를 시도한다. 홀로 남은 그는 이 지루한 세상을 떠나서 소냐의 곁으로 가는 게 더 행복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세상을 지루하다고 느끼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다. 매일 아침 6시 15분 일어나 30분 뒤 동네를 순찰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오베에게는 익숙한 규칙들과 지속성이 세상을 지배하는 원리다. 40년 동안 한 집에 머무르고, 30년 동안 한 직장에서 일을 한 그는 인생에서 특별한 변화를 기대하는 데에 서툴다.
따라서 그들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를 수밖에 없다. 나는 이 부분이 이들 소설의 주제를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결론의 차이로도 이어진다. 오베는 자신만의 규율이 확고하게 정해져있으며 그것과 어긋나는 대상은 매몰차게 무시한다. 남자라면 사브만을 몰아야한다는 생각에 BMW를 산 절친과 갈라서고 게이 소년에게 모진 말을 서슴지 않는다. 한편 이러한 규칙이 항상 답답한 방식으로 펼쳐지는 것은 아니다. 정직함과 정의에 대한 측면에서도 확고한 오베의 신념은 본인이 원하지는 않았지만 여러 사람들의 인생에 개입하는 요인이 된다. 『오베라는 남자』는 소외되고 또 본인 스스로 갇혀있던 개인이 주변과 접촉하면서 나눔의 가치를 알아가는 소설이다. 주인공이 이 가치를 깨달은 순간 소설은 역할을 다 하고 이야기의 매듭을 짓는다.
그러나 알란은 그 어떤 사상과 종교, 때로는 법의 테두리에까지도 구속되지 않기를 바라며 자신에게 영향이 없는한 남이 어디에 소속되어있든 상관하지 않는다. 알란이 스페인 사회주의자 에스테반과 친구가 되었다가 프랑코 장군의 목숨을 구하고, 해리 트루먼과 술잔을 기울이다 마오쩌둥의 아내를 구하고, 스탈린의 만찬에 초대되었다가 미국 스파이로 전업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알란에게는 의견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94). 요나스 요나손은 세계사의 어느 때보다 변화무쌍했던 20세기, 세계 각지에서 악랄하게 벌어졌던 이념의 변화들을 소설 속에 버무려 '사람'보다 '사상'이 먼저가 되는 현실들을 비꼰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로 대표되는 이념들의 싸움부터 각종 종교 분쟁까지 역사 속에서 인간은 자신과 다른 생각에 대한 혐오를 여과없이 보여왔다. 그러나 혐오의 실행 그 중심에 있었던 리더들은 모두 알란을 이용해 각자의 잇속 챙기기 바쁜, 똑같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냉전이 끝난 지금도 여전히 우리는 그러한 이념 대립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100세가 넘은 알란이 또 다른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창문』의 결말이 지어진 것도 그러한 면을 암시한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