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기 전에 대학로에서
동일한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연극을 먼저 보았고 그 연극을 너무나도 재미있게 보았기에 이 소설을 바로 잡게 됐다.
연극을 볼 때나, 소설을 읽을 때나 주인공인 알란을 보면서 내 머리 속에 떠오른 단어는
하나였다. 유쾌함!
주인공의 이름이 알란 카손이기에 알란이요, 폭탄을 잘 다루어서 폭탄
제조자라, 국적이 스웨덴이기 때문에 스웨덴인이요, 나이가
100세이기 때문에 100세 노인이라 하지만 그를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말은 유쾌함 아닐까? 그의 이름은 알란 카손이지만 그는 좋은 술과 좋은 음식만 있다면
서로가 이름을 모르더라도 좋은 친구가 된다. 그는 폭탄 제조자이지만,
그의 폭탄은 사람을 죽이는데 목적이 없으며 민족주의를 위한, 사회주의를 위한 폭탄도 아니다. 그는 스웨덴 국적을 가지고 있었지만 국적과 국가와 별 상관 없이 온 세계를 누빈다. (알란은 수십 년 간의 여행 동안에 제대로 된 여권을 가진 적이 한 번도 없다!) 그의 나이가 비록 100세이기는 하지만 100년 동안의 다양한 경험이 있을 뿐이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노인의 옹고집이나 편견이나 보수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오히려 어떠한 젊은이보다도 새로운 것을 추구하며 규정 받기를 싫어한다. 그렇기에 100세가 되는 생일에 창문을 넘어선다.
그는 유쾌하다. 어린 나이에 양친을 잃고 평생 홀로 살며(혈육이 없다는 의미에서 ‘홀로 산다’는
의미이기는 하다), 억울하게 화학적 거세를 당하고, 몇 번이나
감옥에 갇히고, 수용소 생활까지도 하지만 그는 유쾌하다. 일반적인
사람들이라면 그가 경험한 사건 중 하나만 겪더라도 좌절과 실망에 머물겠지만 그는 이미 일어난 사건 때문에 현실을 망치지 않는다. ‘세상 만사는 그 자체일 뿐이고, 앞으로도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 자체일 뿐이란다.’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생각하며 현재의 나아갈 바를
생각할 뿐이다. 이미 일어난 고통스러운 사건은 그에게 고민의 대상이 아니다. 그 사건은 그 사건 그 자체일 뿐이다. 그는 어떻게 하면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지 생각할 뿐이다.
알란을 보면 노장 사상가들이 말한 ‘소요유(逍遙遊)’와 참으로 부합한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규정 받기 싫어하는 그를 철학자들의 개념 속에 가두는 것에 사과를 표한다)
어떠한 편견도 없이, 사회나 제도와 같은 인위에 얽매이지 않고 사물 그 자체를 누리며 사는
유유자적함. 알란만큼 ‘소요유(逍遙遊)’라는 이 오래된 동양 철학의 이상을 이토록 잘 구현한 이가
있을까? 그에게는 극우주의 독재자 프랑코도, 세계 최강대국
대통령 트루먼도, 혁명가 마오쩌둥도, 공산주의 독재자 스탈린도
맛있는 술과 음식을 같이 할 수 있는 좋은 사람의 여부가 중요하지 그 밖의 그들의 지위나 사회적 역학 관계는 중요치 않다. 국적도, 이념도, 인종도
중요치 않은 진정한 세계시민(Cosmopolitan)인 그이다.
웰빙, 욜로, 소확행 등
행복을 추구하는 삶의 방식을 표현하는 수많은 단어와 개념들이 우리 사회를 떠돈다. 행복한 삶을 만들어주는
방법을 소개하는 자기 계발서와 힐링 서적이 서점과 도서관을 뒤덮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다. 행복이 결여된 사회이기에 행복에 관한 것들이 더 성행한 것일 수도 있겠다. 행복을
개념화하고 그것을 배우려고 하기보다는, 책의 주인공 알란처럼 행복이 무엇인지 크게 고민하지 않더라도
현재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그저 살아가는 그런 삶의 양식을 택해보는 것은 어떨까?
하긴, 가장 당연하면서도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고, 그 어려운 것을 잘 실철한 알란도 소설 속 가상의 인물인 것을 생각해보면 알란처럼
걱정 없이 사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소설 속 유쾌한 노인네의 걱정 없는
삶과 여행 같은 소설을 읽는 것이 행복을 느끼는 나의 한 방식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