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2-23
'채식주의자'
나의 아버지는 건물을 짓는 이였다.
마냥 내 앞에서는 글을 읽지도 글을 읽는 법을 가르쳐주시지도 않았지만, 때때로 이야기를 나누며 참 조밀히 쌓아올리는 분이구나 싶었다. 그리고 어릴적 처음 배운 글짓기 또한 쌓아올리는 과정을 먼저 알려주었다. 정보를 모으고 모아서 가다듬고, 사용할 내용을 추린후 서론 본론 결론으로 타다닥 배치하기. 혹은 기 - 승 - 전 - 결의 짜임새로 글의 긴장감을 끌어올리기. 이런 구조들을 배우다 보니 잘 지은 글을 보거든 웅장한 건물과 같이 마음에 남곤 했다. 1층 부터 4층 까지 얼마나 아름답게 배치하는지, 혹은 그 지반에 얼마나 깊게 밑작업을 해두었는지가 글을 읽으며 주로 관찰하던 부분이었다만, 몇몇 작품들이 이 관점을 흔들어 놓았다.
글이란 이런 것이구나, 새삼 느끼게 해준 작품으로 이 책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지난날 화제가 되었던,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다.
그리고 이번 담론의 주제어는 마치 정원을 가꾸는 마음으로, '조경론'으로 시작하고자 한다.
조경론이라 하면, 공간 배치와 관련된 이론이라 해야할까. 적어도 이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데에는, 정원을 얼마나 아름답게 꾸미는가에 대한 이론으로 알고 있으면 되겠다. 그리고 이 정원은 건물에 딸려 있는 마당과 같은 것일테고, 장소는 책의 도심이다.
글을 읽다보면 머릿속에는 줄곧 온갖 이미지가 쌓여 간다. 등장인물의 얼굴이며, 나오는 건물, 장소, 빛의 위치, 날씨. 대개는 무채색의 이미지로 산개해서, 날씨 중에 얼굴을 그리고, 다시 그 얼굴을 흐리며 장소를 쫓는 식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글의 구조를 그려나간다. 등장인물에 관한 정보나 지명. 혹은 지명과 날씨를 엮어보고. 사람들이 나오면 자연스레 관계도와 감정도를 추적해 그려둔다. 그렇게 인물, 행동, 사건 전후감정, 결과 상태, 장소등을 모두 차곡차곡 엮고 나면 그 그리는 작업도 비로소 끝을 알린다. 대개 나의 독서는 이렇게 요소 하나하나를 그려서 모으고, 이것들을 쌓아올리며 끝이 났다. 책을 읽고나면 머릿속에서 건물 한 채를 성큼 지어내는 듯 하고, 대개 그 주변은 메트로폴리스의 풍경 마냥 빼곡하다. 연관되는 책들, 다른 이야기들. 유사한 도서군으로 한 지역이 설정되면 유사한 책들로 그 지구를 빼곡히 채워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채식주의자를 읽고나면, 묘하게 이상한 기분에 쫓긴다. 읽는 중에는 덩굴에 감기는 듯하고, 읽고 나서는 그 여느 지구에도 배치할 위치가 보이지 않는다. 이 소설이 연상 시켜주는 집은 뭐랄까, 숲 한가운데에 정원이 딸린, 2층 짜리 주택이랄까. 그리고 그 정원에는 집보다 약간 더 커서 깊이 그늘을 드리는 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자연스레 책을 열면, 그 집보다도 나무에 시선을 빼앗긴다. 무성한 잎가지부터 줄기, 그리고 저 밑에 깊숙히 이 지역을 장악한 뿌리까지 따라가보자.
연작소설의 첫 단편은, 본 서의 이름과 동일한 '채식주의자'이다.
화자는 '나'고, 5년간 결혼해지낸 아내가 있다. 문득, 이상한 꿈을 꾸었다며 기묘한 행동을 시작한다. 밤중에 갑자기 나서 있고, 고기를 다 내다 버리며 채식을 선언한다. 묘한 것은 그 꿈을 꾸기전에는 막상 같이 잘 먹기만한 고기였는데. 마냥 고기만 끊은 것도 아니고, 계란, 우유, 흑염소즙 등 온갖 동물스러운 것은 다 거부를 한다. 그리고 대개 말하는 체질 특이성이라던지, 질병, 혹은 윤리와 같은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는다. 마냥, 그 꿈이 원인이라고만 한다. 아내의 꿈인 즉슨, 온통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고기가 메달린 곳에서 도망쳐 나왔는데, 그 자신도 자신이 먹은 고기와 피로 인해 섬뜩해져있는 모습을 보았다는 것이다. 이 단순히 생활 습관으로 치부될 수 있는 일들은 하필 부부동반 저녁식사를 가고, 또 '나' 가 장인,장모에게 알리며 일이 커져가고, 끝내 아내가 그 여느때보다 기묘한 모습으로 '나'와 대면하며 끝이난다.
남편인 '나'는 참 신기하게도 아내에 대해 알지 못한다. 아내의 과거사를 미리 알았더라면, 보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더만 이 행동들을 이해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중간에 나오는 꿈에 관한 이야기들에서, 아내의 이상한 꿈의 시작은 남편과의 좀처럼 없던 분쟁에서 기인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장인의 보통 상식적으로는 이해 되지 않는 행동 - 고기를 강제로 먹이는 행위까지. 칼을 들고 물러난 아내의 모습에서는, 그 억압에 대한 결연한 저항의 의지마저 느껴진다. 아니, 생존을 위한 저항이라 보는게 보다 공정하겠다.
그리고 이쯤되니, 사실 위험했던 것은 아내인 '영혜'가 아니라 주변 사람들 아니었을까 생각이 된다. 폭력에 대한 감각이 누적되어온 삶에서, 영혜는 얼마나 많은 이들을 꿈속에서 죽여온 것일까. 그리고 그것을 행동에 옮기는 충동에 시달려야 했던 것일까. 가끔 온순한 이들에게 위악을 느낄 때가 있다. 알기 어려운, 위험한 듯한 행동들을 하며 주변 이들을 일부러 밀어내는 것이다. 아마 좀처럼 이해받지 못한 이 채식의 행동부터, 조심스럽게 이상함을 표출하며 구조신호와 경고신호를 동시에 보내왔던 것이 아닐까.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다소 오싹한 꿈의 경고가 생생히 울려퍼진다.
이 아내의 기행은 그럼에도 행동 깊숙히 원인에 대해, 아내의 내면에 대해 꽁꽁 감싸진듯한 느낌이다. 도통 물어봐도 꿈에 관한 이야기 뿐이고, 아내의 기행은 마지막 장면 이전까지는 온전히 채식을 하는 것 외에, 별게 있는가? 사실 속옷이니 채식이니도 기행보다는 이해받을 수 있는 삶의 방식이라 생각되는게 더 마땅하다. 그렇다보니 주변이들의 이해할 수 없는 억압에 대해, 우리는 가장 도드라진 충돌을, 잎사귀 끝자락을 비로소 확인한 것 뿐이다. 영혜에 대해, '아내'에 대해 다음 소설들은 보다 깊이를 제공해준다.
그 다음 따라오는 글의 이름은 '몽고반점'이다.
전혀 다른, 예술가의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다. 그리고 읽다보면 내가 아직 온전히 닿기에는 어리구나 싶더라. 아직 결혼도 안했고, 아이도 없고. 결혼 중반즈음의 무료함이나 대인관계에 대해 내가 얼마나 알겠는가. 하물며 예술가의 삶이야.
'채식주의자'에서 영혜는 억압의 결과로 기이한 행동을 표출했던 이라 말한다면, 이제 몽고반점에서는 그 이질감이 교묘히 해석 되어진다. 혹은 이해 되어진다. 다만 이를 예술가의 예술혼이라 봐야할지, 왜곡된 성욕이라 봐야할지, 금단의 사랑이라 해야할지는, 나는 도통 모르겠다. 예술가로서 다소 정체감을 겪고 있던 영혜의 형부인 '나'는 채식주의자에서의 그 사건, 그리고 어느날 문득 아내에게 들은 '동생에게는 20살까지도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남아있더라'는 말로 인해 알 수 없는 욕망에 쫓긴다.
사실 성기가 부푼다던지 하는 직접적인 묘사가 있어, 이 욕망은 마냥 예술혼은 아닌듯 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직접적인 묘사들의 행간과 예술혼을 추적하기보다도 우리의 대상인 영혜로 돌아와보자.
영혜는 신기하게도 직접적인 거절이나 앞선 작에서의 돌출된 행위를 보이지 않는다. 도통 생각해보면 채식/육식의 문제보다, 몸에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촬영하는 행위가 보다 일반인들에게 거부감을 일으키는 행위가 아닐까? 적어도 당장 나라면, 일주일간 채식을 해. 라고 했을 때 가능하겠다 싶지만서도 맨몸에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영상으로 찍어 예술 작품으로 남기고자해. 라는 말을 들었을 때 고민보다 거절이 앞서 나올 것 같다. 심지어 그 작가는 자주 얼굴을 보게 되는 형부다. 이런 제안에 대해 덤덤한 반응의 영혜는 그 자체로 기이해보인다. 다만 앞선 작들과의 차이는 명확히 보인다. 영혜의 말이, 그 여느 때보다 많이 들어지고 반영되는 상황인 것이다. 남편으로부터 이해나 공감받지 못하는 '채식주의자'. 보호자로서의 언니와 극단적인 대립을 보이는 '나무 불꽃'의 사이에서, '몽고반점'에서의 영혜는 가장 안정적이고 자유로워 보인다. 이 작품속의 '나'는 그녀를 모델로서, 욕망과 예술의 대상으로서 다가서기 위해 끝임없이 묻고 의견을 따르고 모습 그대로 담아낸다. 제 아무리 그 결말이 비참한들, 이 작품속에서 영혜는 얼마나 아름답게 묘사되었던가, 있는 그대로 꼿꼿히 자라난 모습에서, 저 굳건한 나무의 둥치를 보는 느낌이다.
하지만 이 몽고반점을 확인하고자 떠나온 기나긴 여정은, 결국 '나'의 아내이자 영혜의 언니가 관계를 가지고 작품을 찍은 장소를 확인하게되며 거대한 비극으로 끝나는데, 이는 다음 작 나무 불꽃의 배경으로 이어지게 된다.
폐쇄병동에 갇혀 지내는 영혜, 전작의 예술가와 이혼한 영혜의 언니인 '그녀'. 연작 소설의 마지막인 '나무 불꽃'은 다소 음울하고 슬프게 시작된다. 그 내용도 여느 작품보다 막강하다. 정신병원에서 모든 식이 활동을 거부하여 나날히 말라 죽어가는 영혜와, 그로 인해 딸의 양육, 생활. 전남편 등의 문제들 사이에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그녀'. 그 사이사이에 과거 가족간의 폭력적인 아버지로 인해 겪은 문제와 동생의 행동을 비로소 해석하는 모습까지 서글피 묘사가 된다. 하지만 해석하였다고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그녀의 가정을 깨뜨린 몽고반점에서의 사건은 생생히 남아있지 않은가. 정신병원에 갇혀 본인을 나무라 지칭하는 영혜의 기행은, 살려달라고 애처로이 간청하는 듯하다. 이 정신병원에서 해방시키거든 다시 건강해질 수 있지 않을까하며, 그것을 화자인 '나'도 익히 잘 알고 있을 것이 섬찟하다.
가장 와닿는 지점은 어린시절의 '그녀'와 영혜가 산에서 길을 잃어 집에 돌아가기를 주저하는 대목이었다. 정작 '그녀'는 집에 가는 길을 찾아 안도했지만, 영혜는 기뻐하지 않고 저녁빛에 불타는 미루나무들을 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유독 아버지의 폭력은 영혜에게 향해 왔기 때문이다. 그 어릴 때의 망설임과 덤덤함은 깊이 뿌리내리고 자라나 마침내 지금 다시 물어온다.
"...... 왜, 죽으면 안되는 거야?"
아버지의 폭력과 언니와 어머니의 거리를 두는 행위들 사이에서, 영혜라는 인물이 겪어야 했을 그 긴 고통을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사실 폭력보다도, 이 소설에 일관되게 암시되는 '억압'의 행위와 그에 저항하는 영혜의 행동들은 너무 가련하기 그지없다. 흔히들 말하는 가족이라는 집단 내에서, 얼마나 강한 억압하는 행위들이 와닿았던 것일까. 강렬한 묘사 이전에, 이 동물적인 생동감, 통제권을 잃고 서서히 식물처럼 가만히 길러지는 영혜의 모습은 채식주의자인 동물이 아닌 동물과 공존치 못하는 식물의 모습만이 남는다.
마침내 글을 다 읽으니, 처음 이끌려 왔을 때 저 옆에 있던 글의 집은 하잘것 없어보인다. 멘부커 상이라는 팻말과 한강이라는 작가의 명패. 채식주의자라는 선선한 제목과 표지. 그 외적인 건물에 대한 안내에 시선이 돌아갔건만 어느덧 그에 딸려있는 영혜라는, 억압받는 거대한 나무에 끌려가버린 것이다. 돌이켜보면 놀라운 짜임새와 배치가 있었다. 연작 소설의 형식도 좋고 각 글마다 위기감과 해소가 얼마나 적절히 배치되었던가. 그리고 같은 대상에 대해 매번 화자가 바뀌는 것도 이 글을 생생히 읽게 도와준 교묘한 장치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럼에도 이런 모든 특징을 잊고 글에 쫓아가도록 이끄는 강렬한 이미지들이 있다.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불꽃' 각각 잔혹하거나, 선정적이거나, 극단적인 이미지를 머릿속에 각인시켜 읽는 내내 한편으로 불안한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끝에 과연 영혜가 비정상이었고 이 소설은 비정상인에 대한 묘사였나? 하는 의문이 남는다. 물론 내 대답은 '비정상인의 묘사가 아닌,보통의 사람에게도 저 환경이었다면...?' 하는 다른 질문을 가져다 주지만서도. 어딘지 찝찝한 느낌이다.
한 인물에 대한 다채로운 시각과 해석. 어딘지 모를 찝찝함. '억압'이라는 공통요소. 이렇듯 한 글을 꿰뚫어보았으니 다시 조경론으로 돌아와보자.
여지껏 글 중에는 쌓아올리는 글을 참 권장받지 않았던가.
한참 쓰던 자기소개서가 그랬고, 보고서가 그랬고, 저기 미국의 몇몇 작가들이며 내가 사랑하는 몇몇 작가들도 그랬다. 설정으로 한 세월 고민하고 또 글을 쓰니, 그 쌓아올리는 과정은 여간 중요한게 아니다. 한강 작가도 끝의 작가의 말에 감사인사 드린 사람들을 보면, 사실을 조사해 쌓아올리지 않았다면 이만한 글이 나오지는 못했겠지.
다만, 여전히 이 책은 기존의 책의 도심에서 벗어나 있는 느낌이다. 정교해져있는 글과 서사의 구조에서 벗어나, 철저히 옆에 있는 한 인물을 비춰내고 있다. 절대 화자가 '영혜가' 된적이 없이, 지독히도 관찰만을 시도한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시선으로. 그 과정을 다 겪고 나서 한걸음 떨어져 보니, 비로소 심상에는 큰 나무와 작은 주택이 오손도손 지어져 있는 것이다. 아마 저 집의 지반 또한 나무의 뿌리가 깊숙히 얽혀 있겠거니.
그리고 앞서 말한 강렬한 이미지나 억압, 가정사와 같은 요소는 마치 덩굴 처럼 읽는 와중에 마음을 깊숙히 채어간다. 다소의 불안감, 불편, 공포감, 기이함. 한글로서도 온전히 닿기 힘든 이 감각들을 외국어로 어찌 번역하였기에 고스란히 전달했을지, 호기심마저 남는다.
아마 이와 비슷한 글들을 굳이 떠올리라면, 고래라던지, 상실의 시대와 같은 묘한 책들이 해당되지 않을까. 언제고 저 책들에 대해서도 글을 남기고 싶다만, 마냥 같은 도심에 따닥따닥 붙어있는 책들이라기 보단 전혀 다른 지역의 비슷한 심상을 남긴 책들이 아닌가 싶다.
꼭 읽어보라기엔, 마냥 우울하다. 새 봄 새 학기에 읽기에는 다소 침울하지 않을까.
다음 가을밤께 선선히 읽기를 추천한다.
나와 같이 책을 읽으며 여느 정원과, 큰 나무와, 작은 주택을 발견하기를 바란다.
2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어제
2018/02/26
저는 일전에 이상문학상 작품집에서 '몽고반점'만 읽은 적이 있는데요. 등장인물 '영혜'가 무척 자유롭다고 느꼈어요.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요. 그리고 몸에 대해서도요. 욕망과 감각에 대해서도요.
한편으로는 제 나름대로의 생각에 사회에 잘 적응하여 사는 평범한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술적인 삶은 정말 토악질이 나올 만큼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는중입니다
2018/03/02
몽고반점에서는 분명 자유로워 보이지만 정작 마음 상태라던지 행복한 상태인건지 짐작하기 어려워서 아쉬웠어요. 한편으로 순수 문학에 대한 대중의 소비가 줄어드는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토악질이 나오는 아름다움에서 기인하는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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