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길었던 장마가 끝난 기분이다. 앞서 읽었던 연금술사를 하루 만에 뚝딱 읽어낸 반면 이 책은 넉넉잡아 일주일 정도 걸린 것 같다. 이는 책의 내용이 어려웠기도 하지만 러셀의 논리가 익숙하지 않은 탓이 컸던 것 같다. 러셀은 그의 더할 나위 없는 철학적 소양과 오랜 연구를 통한 날카로운 '인식론'에 대한 논리를 이 책에 담았다. 따라서 비전공자가 가볍게 읽기에는 너무 무거웠고, 그 탓인지 인식에 대한 철학적 담론에 어느정도 익숙했음에도 어려웠고 지루했다. 또한 이 책은 번역되어 있다는 것에 한계를 명확히 드러낸다. '직접지'나 '비아' 같은 러셀이 영어로 썼을 의미를 한자로 직역한 듯 보이는 단어가 이 책의 난이도를 더욱 높혔다. 문맥상 의미는 '직접 알 수 있는 것'과 '내가 아닌 것'이다. 뭐 이런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책의 내용은 참 좋았던 것 같다. 인식론에 대한 데카르트, 칸트, 헤겔 등등 다양한 철학자들의 주장을 담아내고 또 적절히 반박하거나 강화함으로써 기본적으로 '인식론'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도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선택했다. '인식론'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그 첫걸음을 시작한다면 이 책보다 나은 선택지는 없으리라. 감히 평하자면 책의 마무리를 지으며 철학적 지식의 한계와 철학의 가치를 역설하는 부분이 최고였다. 모든 학문은 스스로의 연구 범위를 확정지으며 정의내려진다. 그렇기에 그 학문에 대한 충분한 지식과 이해가 바탕되어지지 않는 정의라면 무의미할 것이다. 다행히도 그리고 당연히도 러셀은 다른 누구보다도 훌륭하게 철학의 범위를 설명하며 정의내렸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 책의 한글판 이름이 원제의 번역인 '철학의 여러 문제'였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러셀이 다루는 이러한 '인식론'은 철학에 입문하며 보기에는 다소 사변적이라 현실과 괴리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물론 러셀이 이 책에서 다룬 다양한 철학적 담론이 다른 철학적 논쟁에서도 유효하다는 것은 중요한 포인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