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여름방학. 더운 날에 밖에 나갈 엄두도 못 내고 선풍기를 쐬며 집에서 시간을 축내고 있던 나는 문득 어렸을 적 봤던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 시리즈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물론 내용도 어김없이 재밌었지만 또 다른 재미를 발견할 수 있었으니, 방송 중간 중간 밑에 나오는 당시의 뉴스 헤드라인들이었다. 옷도, 화장도 지금 보면 촌스럽고 피쳐폰으로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모습에 추억에 잠기기도 하지만 화면 밑에 줄줄이 지나가는 뉴스 헤드라인은 지금과 너무나도 비슷했던 것이다. '장바구니 물가 사상 최대', '취업난 심화', '역대급 한파' 등등.. 이런 것들을 보면서 한편으론 놀랍기도하고 언제 어디서나 사람사는 건 다 똑같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문득 다시 읽어본 것이 에밀졸라의 <보완물>이다. 보완물은 이 책에 들어있는 단편 중 하나인데, 한 번 읽은 책은 다시 읽기 싫어하는 나도 간간히 다시 읽을 만큼 재미있고 통찰력있는 단편이다. 제목 '보완물'은 한마디로 못생긴 여자를 옆에 두어서 상대적으로 예뻐보일 수 있게끔 못생긴 여성을 대여하겠다는 어느 사업가의 기발하지만 반인륜적인 사업 아이디어를 의미한다. 때는 1800년대 파리. '문명화된' 도시 주민들은 '진실' 보다는 '가짜'를 더 높이 평가한다. 가짜 눈썹, 가짜 헤어피스, 가짜 보조개.. 이러한 광경을 보고 있던 어떤 사업가는 기가 막힌 사업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되는데, 그것이 못생긴 여자를 대여해주는 것이었다. 애써 꾸미지 않아도 못생긴 여성과 옆에 있으면 평범한 얼굴이 아름다워 보인다는, 오늘날로 말하자면 '상대적 오징어이론'을 발견한 셈이다. 그리하여 그는 숙련된 헤드헌터로 하여금 정말 순수하게, 누가 봐도 못생긴 여성을 찾아내게 하여 사업을 개시하게 되고, 가끔은 직원으로 채용하고싶을 만큼 못생긴 고객이 와서 애를 먹기도 하지만 그의 가게는 '보완물'을 대여하려는 고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게 된다. 하지만 '보완물'로 근무하는 직원들의 슬픔은 날로 커져만 가는데, 누군가의 사랑이나 인기를 위한 도구로서 자신의 외모가 쓰인다는 사실이 기쁠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고통 받는 영혼이 이 세상 진보에 얼마나 중요하겠는가? 인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행진해나간다'며 소설은 끝이 난다.
정말 놀랍지 않은가? 200년 전의 파리 사회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시대와 너무 닮아서 나는 읽을 때마다 신기함을 느낀다. 키높이 구두와 두꺼운 화장, 가발과 성형수술이 판치는 이 시대는 모두가 누군가의 보완물이 되지 않으려고 애쓰는 듯이 보인다. 외모로 순위를 매기고, 더 더 나은 외모를 추구하려 한다. 책은 이러한 세태가 '진보'의 한 방향이라고 비꼬듯이 일축했지만 200년 후에 돌아본 우리의 모습은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했으니 어찌보면 서글픈 일이다. 내면이 중요하다는 다 아는 얘기를 써봤자 뭘하겠는가. 중요한 건 누군가를 찬찬히 들여다 볼 충분한 시간이다. 웃을 때 휘어지는 눈 , 놀랐을 때 어깨가 움츠러드는 모습, 울때의 표정. 겉모습을 볼 때도 시간을 두고 찬찬히 보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아름다운 광경이 나타날 때도 있다. 나 자신으로부터든, 상대방으로부터든. 요즘 <효리네 민박>이 방영되면서 이상순씨가 인기를 끌고 있는데, 비슷한 맥락 아닐까? 편안한 미소와 잔잔한 목소리에 빠진 사람이 많은 것 같던데. 시간을 두고 볼 수 있는 사람, 시간을 두고 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정말 행운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