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매우 흥미롭게도 인간의 애정표현인 '키스'의 유래와 역사에 대해 설명한다. 보통 두 가지 기원을
찾을 수 있는데 하나는 말 그대로 ‘본능’이라는 관점인, 생물학적 기원, 다른
하나는 사회가 발전하는 과정 속에서 구성되었다는 사회 문화적 기원이다. 그러나 키스의 섹슈얼한 면모
때문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자의 경우에 국한되어 키스를 이해하려고 한다. 실제로 지인들에게 키스를
왜 하냐고 물어본 결과 십중팔구는 ‘본능’이라고 응답했다. 키스는 자연스럽고 선천적이기 때문에 다른 논리적 설명이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키스는 ‘본능’이라는 두 글자로 대충
해명하고 넘어갈 수 있을 만큼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최소한 그 본능, 즉 생물학적 기원의 구체적 내용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생물학적으로
최초의 키스는 먹이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나타난다고 한다. 유아를 비롯한 포유류는 생후 몇 달 간 모유수유
과정에서 이른바 핥으며 빠는, 키스의 유사 행위를 경험하게 된다. 이후
모유에서 고형 음식의 섭취로 넘어가는 단계에서도 여전히 키스와 유사한 행위는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현대
인류는 이유식 등으로 대체되어 잘 나타나지 않지만, 조류를 관찰하면 어미 새가 부리로 먹이를 잘게 쪼개어
새끼에게 입에서 입으로 전달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동물은 태어나 먹이를 섭취하는 과정에서
입을 접촉하는 행위를 반복적으로 하게 되고 이것이 키스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커센바움은 먹이를 섭취하는 과정뿐 아니라 채집하는 단계에서도 키스의 기원을 찾기도 한다. 수백만 년 전 인류는 직접 먹이를 찾아나서야 하는 수렵 채집 사회에 살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숲과 덤불 사이에서 잘 익은 열매를 찾는 탐색 능력을 갖추게 되었고 여기서 붉은색, 즉 보상을 탐지하는 것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주장이 있다. 이러한
생물학적 영향에 의해 붉은색인 입술에 집중하고 그를 매력적으로 느낀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키스가 먹이를 섭취 및 채집하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보다 보다 널리 알려지고 강력한 주장이 있다. 바로 육체적 본능, 즉
바로 키스는 성행위의 전희라고 보는 견해이다. 이는 모두가 알다시피 현 인류에게서 대단히 잘 관찰되고
있다. 그리고 인간이 아닌 동물들도 짝짓기 이전에 서로를 물고 핥는 등 입을 사용한 애무가 나타나는데
이러한 행위가 발전해서 키스가 되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키스는 생물학적으로 인사를 의미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많은 인류학자들은 최초의 키스가 입술이 아니라 코를 통해 이루어졌을 것이라 추정한다. 이는 폴리네시아의 전통적인 인사 방식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그들의
인사법은 서로 코를 대로 앞뒤로 문지르며 냄새를 맡아 상대를 식별하는 것이다. 이 독특한 인사법은 친구와
적을 구분하고 상대의 건강 상태에 대한 단서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도 활용된다. 이 인사는 코에서 점차
입으로 변화해 현재의 가벼운 키스와 같은 양상을 띠게 된다. 그러나 점차 인류의 언어능력이 향상되면서
동족을 인식하기 위해 체취를 맡을 필요성이 없어졌으나 인간관계의 유대감을 공고히 하기 위한 방안으로 계속 남아 있을 것이라는 입장이 있다.
정리하면 키스는 생물학적 본능이며 먹이를 탐색 및 채집하는
행위, 성행위의 전희, 그리고 인사에서 기원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키스 행위를 단순히 동물적 본능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키스의 애정표현화는 생물학 이외에도 사회 문화적 힘들이 작용해 형성된 결과이다. 찰스 다윈의 『인간과 동물의 정서의 표현The Expression of the emotions in men and animals』(1872)에 의하면, 키스는 선천적인 행동이 아니다. 다윈은 유럽인들은 애정의 징표로서의 키스에 너무나도 익숙하며 그를 인류의 천부적인 행동으로 여기지만 이는 오류라고
주장한다. 그는 풰이고 섬을 비롯해, 뉴질랜드, 타이티, 파푸아족, 오스트레일리아, 소말리아 등 일부 원주민에게서 키스 행위가 나타나지 않았음을 근거로, 키스는
사회문화적으로 학습되는 행위임을 역설한다.
따라서 키스를 보다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생물학적
기원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그 사회문화적 기원을 추적해야 한다. ‘광기’나 ‘처벌’이 아닌 키스가
고고학이나 계보학의 대상이 됨을 의아하게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푸코는 『성의 역사』에서 성 정체성조차도
자연적이고 본질적인 모습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힘 관계들에 의해 문화적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키스 역시 충분히 권력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고 구체적으로 탐구할 가치가 충분하다.
키스에 대한 담론을 에피스테메별로 어떻게 변화했는지 살펴보면
우선 르네상스 시대는 고대 그리스 시대를 모델로 한 만큼 인간의 사랑과 그 표현에 대해 상당히 열린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고전주의 시대에서는 금욕적인 생활을 강조했기 때문에 애정표현이 자유롭지 못했으며 키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근대에 이르러 산업혁명을 겪으며 도시화와 산업화가 진행되며 기존 기계적 연대가 해체되고 유기적 연대가
도래하며 자유연애사상이 만연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낭만적 신체접촉인 키스 역시 다시 증가하는 양상을
보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대 사회는 키스에 대해 매우 우호적인 입장을 보이며 더 나아가 그를 권고하고
있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우선 키스는 엔돌핀의 분비를 촉진시켜 기분을 도취시키고 행복감을 불러일으킨다고
한다. 또한 서로 타액을 교환함으로써 몸의 염분과 피지를 주고받는데 이 행위가 연인 간의 관계에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키스는 치아에도 좋다. 키스를
하면 입 안에 타액이 다량 분포되며 치석을 제거해준다고 한다. 그러나 정말 이러한 효과덕분에 키스를
하는 것일까?
놀랍게도 계보학적으로 접근해보면 키스 역시 『광기의 역사』의
이성과 마찬가지로 정의 및 관념의 변화를 겪은 바가 있다. 1940년대와 현재 21세기 초반을 비교해 보면 키스에 대한 지식 체계가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1948년
알프레드 찰스 킨지는 보고서 「인간 남성의 성욕Sexuality in the Human Male」를
통해, 제1차세계대전 이전에 결혼한 미국인들 중 혀를 사용한
‘프렌치 키스’를 경험한 사람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조사에 의하면 그들은 키스를 비위생적인 행위이며 시간낭비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보다 놀라운 사실은 프렌치 키스 경험 유무가 교육 수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는 점이다.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약 77%가 프렌치 키스를 한다고
한 반면, 중등교육 수준에 그친 사람들은 겨우 40%만이
그렇다고 응답했다. 다시 말해, 프렌치 키스에 대한 지식이, 불결한 타액의 교환에서 애정의 표현 수단으로 변모한 것이다.
이러한 변모의 배경에는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권력이 존재한다. 자본주의의 핵심은 지속적인 소비이다. 끊임없이 자본이 돌아가기 위해서는
소비가 일어나야 하고 시장은 고객이 소비하기 좋은 구조를 형성한다. 사회적 분위기 역시 마찬가지로 절약하고
검소한 삶보다는 쓸 때는 쓰는 삶이 보다 현명하고 매력적이며 자신을 위해 투자하지 않으면 시대착오적인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 이러한 분위기는 현대의 연애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현대의 연애는
자본주의와 결합해 달콤하고 화려하고 자극적이게 물들어있다. 우리는 연애를 위한 소비가 아니라 소비를
위한 연애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연애는 소비를 촉진시키는 매우 훌륭한 요소다. 연인과 데이트하기 위해 식사를 하고 영화를 보고 차를 마시고 기념일에 선물을 하는데 모두 소비가 필수적으로
동반된다. 이러한 연애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따라서 가급적이면
사람들은 연애를 해야 하며 그 기간이 짧으면 금상첨화다. 결과적으로 자본주의 사회가 원하는 연애는 빨리
불타오르고 밖에서 데이트를 즐기며 단기간의 만남 후 이별해 다시 또 새로운 사람을 만나 이 주기를 반복하는 형태이다. 자본주의는 오랫동안 서서히 알게 되어 십 년간 진득하게 사랑하며 집에서 데이트를 즐기고 기념일은 미소로 대체하는
장수 커플 따위는 선호하지 않는다. 그들의 사랑은 깊을지 몰라도 소비에는 최악이기 때문이다. 단기간에 끝날 수 있게 스킨십 진도도 빨리 나가고 애정표현에도 과감해야 한다.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키스 역시 권장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