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된 지 10년이
한참 넘었고, 이미 절판된 지 오래인 책이지만, 이 책은
지금 바로 이 시기에 가장 빛나는 책이다. 이것은 캐나다의 한 남자와 그 가족들의 일들을 서술한 다큐멘터리
형식의 책이다. 이 남자가 어릴 때 겪은 모종의 사건은, 그와
그 가족에게 지옥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그 사건을 일으킨 주동자 격인 '명성있는' 학자 존 머니의 주장은
현재까지도 반성없이 누군가에게 핵심적인 이념이 되고 있다. 이 모순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서
책을 읽게 되었다.
캐나다에서 쌍둥이로 태어난 ‘브루스 라이머’는 신생아 시기 포경수술을 받다가 의사의 과실로 인하여 성기가 거의 타 들어 간 정도로 손상되었다. 이에 고민하던 그의 부모 론과 재닛은 수많은 의사를 찾아갔지만 완전한 성기 재건 수술은 불가능했다. 이러던 도중 론과 재닛은 당시 존스 홉킨스 대학교 병원에서 트랜스젠더(Transgender),
양성(Intersex), 젠더(Gender)론을
연구하고 성전환수술을 최초로 시행했던 사람들 중 하나인 ‘존 머니’ 박사를
알게 된다. 존 머니 박사는 브루스의 부모에게 계속 성기가 완전하지 못한 남성으로 살면서 편견과 괴롭힘을
당할 바에야, 차라리 여성으로 성 전환을 하자고 설득한다. 이에
‘브루스’ 라이머는 여성으로 성 전환을 받고(물론 자신의 의지는 반영되지 않았다. 신생아이므로.), ‘브렌다’ 라이머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는 그들에게 악몽의 시작이었다.
론과 재닛에게 존 머니 박사는 브렌다에게 절대적으로
여성이라는 생각을 하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들은 그것을 그대로 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렌다는 계속 ‘남성적인’ 행동들 만을 해댔다. 예를
들어 남자 아이들과 주먹다짐을 한다든지, 유아기때부터 군대놀이, 칼싸움놀이를
즐긴다든지, 소변을 서서 본다든지 등의 행동들이었다(이러한
행동들은 ‘남성적’ 행동들이 선천적으로 근거한다는 하나의 증거가 될 것이다). 그는 이러한 행동들 때문에 여자아이들에게는 남자같다는 이유로, 남자아이들에게는 여자라는 이유로 함께 어울리지 못했고, 초등학교
시절부터 끔찍한 따돌림에 시달렸다. 후에는 스트레스로 인한 지능 퇴행으로 자신의 자물쇠 번호를 기억하지 못하여
친구가 대신 열어주어야 했을 정도라고 한다. 유급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러한 와중 존 머니 박사의 기행적인 실험은 계속되었다. 아직 10대로 막 사춘기에 접어들던 브렌다는 난소는 물론 고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남성적 2차 성징이 일어난다. 이에 존 머니는 트랜스젠더와의 합석 자리에서
브렌다에게 여성 생식기 재건 수술(엄밀히 얘기하면 ‘재건’이 아니라 초건이지만)과 여성 호르몬 요법을 강권하고, 산모의 분만 장면을 보여주고 그의 생각을 물었으며, 인간과 동물과의 성교(수간 행위)나
대소변을 먹는 비정상적 성교장면을 보여주는 엽기적인 실험을 펼쳤다. 또한 브렌다의 성적 지향성을 알아보기
위하여 머니 박사가 그에게 보여준 사진은 포르노였다. 물론 그의 부모에게는 이러한 사실을 철저하게 숨겼다.
브렌다는 자신이 여성이라고 하는 세상에서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스스로 아무리 보아도 일반 여자아이와는 달랐기 때문이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은 자신의 사타구니에 있는 끔찍한 흉터자국을 보고도 느꼈을 것이다. 거기다 여자아이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했으니 그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고 있었다. 그 와중 아이들이 초보적인 성의 궁금증을
갖는 시기가 오고, 브렌다는 또래 ‘여자아이’들에게 설렘을 느꼈다고 한다. 친구들과 어울린 파자마 파티에서 그는
또래 여자아이들이 환복을 위해 옷을 벗을 때 앞에 있던 느낌을 ‘팔이 잘린 상황에서도 목이 마르면 자기도
모르게 물 잔이 놓인 쪽으로 팔을 움직이게 된다. 본능이다.”라고
비유했다. 여성에게 설레던 것, 이것이 여성으로 살던 그가
가장 혼란스러웠던 부분이라고 한다. 나아가 계속 머니 박사에게 성 전환 수술과 호르몬 치료를 강요받던
그는, 여자로써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처럼 연기하는 것이 답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립스틱을 바르고, 볼 터치와 마스카라를 하고, 핸드백을 들었다. 모든 외적 상황이 브렌다를 압박했던 것이다.
결국 그를
상담하던 정신과 의사들은 한 둘 씩 브렌다의 성전환 수술 성공에 의문을 갖게 된다. 존 머니 박사는
브렌다의 극도로 날카로운 저항과 일상생활의 부적응을 직접 보면서도 브렌다가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잘 확립하고 있다는 왜곡된 논문을 계속 발표했다. 이를 본 의사들이 직접 브렌다와 상담을 해 보면서 불일치를 느낀 것이다. 그러면서도
머니 박사의 명성 때문에 그것을 밝히기 힘들어 했다. 하지만 몇몇 용기있는 의사 덕분에, BBC 다큐멘터리로 존 머니의 기행적 실험이 폭로되고, 브렌다 사례가
공개된다. 나아가 극단적인 저항에 성 전환 실패 결론을 내린 윈터 박사는 결국 브렌다에게 사실을 알리기로
한다. 아버지 론에게 지금까지의 과정을 들은 브렌다의 감정은 ‘안도감’이었다고 한다. 자신이 돌연변이도,
정신병자도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다는 것이다. 동시에 그는 론에게 가장 먼저 ‘예전의 자신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를 물었다고 한다. 그의 혼란함이 풀리고 자신이 누구인지 찾는 질문인 것이다. 그 후
그는 남성으로 다시 성 전환을 하게 되고, '데이비드' 라이머로 개명하고 결혼을 했으며 아이까지 양육하게 된다. 그러나, 38세의 나이로 결국 권총 자살을 택한다. 이 때도 존 머니 박사는 여전히 성별환경결정론을 주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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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머니 박사는 ‘젠더’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만든
사람이다. 젠더론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세상에는 생물학적
성 즉 ‘Sex’가 있고, 사회적인 성 ‘Gender’가 있다는 것인데, 우리가 통상 ‘남성적이다’ ‘여성적이다’ 라고
얘기하는 것은 선천적으로 원래부터 그러한 것이 아니고, 사회적으로 남성은 ‘남성답게’, 여성은 ‘여성답게’ 만드는 사회적 교육을 받아서 그렇다는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남성과
여성이 다른 것은 생식기의 차이뿐이고, 나머지 특성들은 어린시절부터 교육되어온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언뜻 들으면 맞는 말 같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정면으로 반박된다.
성별이 사회적으로 결정된다는 젠더론은 당시 보부아르의
사상과 겹쳐지고, 그 생각의 추종자들이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 틀을 인용하며 페미니즘 사상이 만들어지게
된다(유산계급의 무산계급 억압 = 남성의 여성 억압). 또한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2016년 6월 29일 기사를 인용하면 “… 성 주류화 주창자인 뉴질랜드 출신 존 머니 교수는 “성별은 양육과
교육에 의한 구분일 뿐이며, 남자나 여자의 차이는 학습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의해 강요되는 것이라는 시몬 드 보부아르 같은 이른바
여성해방론자들의 주장과 맥을 같이 한다. 서구 대학들의 정규과목으로 자리 잡고 있는 여성학(Gender study)도 이러한 시각을 뿌리로 한다. 커밍아웃 레즈비언으로
여성학의 개척자로 꼽히는 주디스 버틀러 교수는 남녀 구분은 남존여비(男尊女卑) 사회에서 강요된 것이며, 동성결혼은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획일적인 이성간의 일부일처제 결혼제도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와
같은 주장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어린 아이의 끔찍한 사고에 고통받던 부모를 꼬드겨 근거 없는 학설을 기반으로 한 성 재지정 수술을 받게 하고, 아이에게 여성 생식기 재건 수술과 호르몬 치료를 강요하고, 자신의
실험을 위하여 포르노를 보여주고, 엽기적인 성행위 자료를 보여주며, 쌍둥이
동생과 성교 행위를 묘사하도록 하고, 이러한 사실을 철저히 왜곡하여 논문을 발표하고 그 사실을 데이비드
가족에게는 숨긴 존 머니 박사. 그가 만든 ‘젠더’라는 용어, 그리고 그 용어가 가진 의미, 즉 사회가 성별을 결정한다는 병적인 ‘사상(이는 과학이 아니다)’ 을 기반으로 한 것이 바로 현재의 페미니즘
운동이고, 젠더론이다. 두산백과에 따르면 “유럽연합(EU)과 미국 등 다수 국가가 주장하는 젠더는 남녀차별적인 섹스보다 대등한 남녀간의 관계를
내포하며 평등에 있어서도 모든 사회적인 동등함을 실현시켜야 한다는 의미가 함축돼 있다.”고 한다. 평등, 대등, 사회적
동등, 편견 철폐, 사회적 억압 탈피 등등의 ‘좋은 말’들의 이면에는 이와 같이 비상식적인 한 과학자의 병적 이데올로기가
근간으로 숨어있다. 이걸 알고 나서도 이념적, 선동적인 ‘좋은 말’들을 감히 입 밖에 낼 수 있을 것인가. 매드 사이언티스트인 존 머니와 그의 유사과학적 이념에 피해를 직격으로 받은 데이비드를 보고도 사회적 성별의
틀 아래서 자신이 억압받는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인권’을 부르짖을 수 있는가. 역사상
현재만큼 대한민국 사회에 성별 논란이 뜨거웠던 적이 없으며, 페미니즘 운동이 활발했던 적은 없었다. 바로 지금 이 시기에, 그 병적인 사상이 우리 사회와 대학가에 만연한
현재, 이 책은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 외롭게 빛을 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