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episteme)이란 무엇인가?>, 이는 《테아이테토스》의 테제이다. 이 대화편의 제목이기도 한 테아이테토스는 대략 열여섯 살 난 못생긴 소년, 불임인 산파이자 남색가인 소크라테스에 의해 지혜를 임신하게 될 새로운 씨받이이다. 소크라테스는 대뜸 혼자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난관에 봉착했다고 말하며 이 지혜를 사랑하는 소년의 호기심을 유혹한다. 그가 말한 난관이란 다름이 아니라 <앎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 소크라테스는 적극적으로 테아이테토스를 문답식 대화에 끌어들이며 지혜를 선보여 줄 것을 청한다.
“지혜로운 분이 이와 같은 것을 지시하는데 어린 사람이 안 따른다는 것도 도리가 아닐 것이네. 그러니 대범하게 잘 말해 보게. 자네에게는 앎이 무엇이라고 생각되는가?”(146c1)
하지만 총명한 테아이테토스는 앎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관한 첫 번째 대답부터 소크라테스의 점잖은 질책을 받게 된다. 겉보기에 소크라테스는 “와, 대범하고 후한 대답이군 그래. 여보게, 요구받은 건 한 가지인데도 자넨 단순한 것 대신 여러 다채로운 것을 제시해 주는 군”이라며 테아이테토스를 칭찬해주는 듯하지만, 이내 그러한 <다채로운 것>이 단지 변죽을 울리는 우스꽝스러운 것임을 스스로 나서서 밝히는 바, 먼저의 말에는 이미 신사적인 빈정거림이 내포되어 있는 셈이다. 소크라테스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테아이테토스가 명쾌한 하나의 정의를 내놓지 못하고 다만 여러 사례들을 제시하는 데에 그쳤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와 그를 조종하는 극작가 플라톤에게 그러한 <다채로운> 대답은 심히 못마땅하다. 그들은 앎에 대해선 그에 상응하는 한 가지 단순한 본질(ousia)만이 실재하고 따라서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반드시 그 무엇을 언표하는 것이어야만 한다고 믿을 것이기 때문이다. 앎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있어서 플라톤은 이렇듯 그의 근본적인 믿음에 따라 단 하나의 절대적인 정의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때 우리는, 우리가 앎이라는 단어를 배울 때 우리는 그것을 정의(定義)로써 습득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오히려 앎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라면 우리는 테아이테토스가 처음에 답한 바로 그 방식대로 배웠다고 해야만 할 것이다(이렇게 보자면 테아이테토스는 단박에 진리를 말한 셈이다). 사실은 그렇지 않고서야 앎의 정의를 찾아 헤맬 수가 당최 없지 않은가. 소크라테스와 테아이테토스를 비롯해 모든 인간이 앎이 무엇인지를 정의를 통해 배웠지만 언제부턴가 일제히 그것을 <잊어버렸지> 않았다면 말이다(뒤에 가서 밝혀지겠지만 이게 바로 영리한 소크라테스가 <떠올린> 해결책이다). 물론, 앎이란 도대체 무엇인가(ti poteestin)를 물을 때에 우리는 앎의 쓰임과 그 낱말을 어떻게 배웠는지뿐만을 의문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앎이 무엇인지를 규정하려 듦에 따라 다채로운 것들로써 열려있었던 앎을 한 가지 정의로써 닫아버리려고 하게 된다는 점이다. 사태를 이쪽으로 이끄는 동력은 앞서 시사했듯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본질주의 혹은 이원론적 믿음이다.
이리하여 소크라테스는 자조적으로 말했듯 평범하고 간결하게 대답하는 것이 가능한데도 끝없는 길을 돌아다니게 되고 만다(82p). 스스로 보기에도 이는 꼭 병(nosos)에 걸린 듯 보이게 마련이니, 앎 자체라든가 완벽한 앎이라든가 앎에 관한 엄밀한 이해라든가 하는 이상야릇한 것들에 대한 도착증이 그의 주된 증상이다. 바야흐로 온갖 모순과 역설이 창궐한다. 그러니 여기서 묻거니와, 엄밀한 이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 게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본질과 어떻게 그리 단숨에 동일시될 수 있단 말인가(akribeia, 즉 엄밀성이 플라톤 철학에서 곧잘 진리성과 연관된다는 주603의 설명은 심상치 않은 대목이다)? 소크라테스의 어법으로부터 또한 알 수 있는 것은 앎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는 기실 완벽한 앎과 불완전한 앎이라는 둥 엄밀한 이해와 불충분한 이해라는 둥 하는 대립과 그것에 관한 판단 능력까지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일단 있는 그대로의 앎이 있다 치더라도 한 번 더 검증이 들어가야 한다는 피곤한 관료주의적 사고이다(물론 이로 인해 후에 가서 또 한 번 정의(定義)의 실패를 겪게 된다). 하기는 참된 본질이라는 우람한 잣대가 그의 온 정신을 휘어잡고 있으니 달리 수가 있겠는가?
앎을 있는 그대로의 지각이라고 보는 프로타고라스의 관점은 이와는 완전히 대조적이다. 프로타고라스는 <자기가 겪고 있는 것은 언제나 참이다>(167a9)라고 말하는데, 이는 명석한 테아이테토스가 과감히 내디딘 앎에 대한 첫번째 정의, 즉 <앎은 지각이다>라는 명제를 대변하는 주장이다. 여기서 뒤집히는 것은 소크라테스와 테아이테토스가 합의한 <앎과 지혜는 동일한 것이다>(145e5)라는 명제이다. 왜냐하면 프로타고라스는 앎을 지각에 관한 진리의 영역으로, 지혜를 이로움과 해로움에 관한 유용성의 영역으로 구분하기 때문이다. 이때 참으로 교묘한 것은 170a 이하에서 소크라테스가 늙은 테오도로스를 프로타고라스라고 부름으로써 우선 그를 프로타고라스와 동일시한 뒤 “인간들은 지혜는 참된 생각이고 무지는 거짓된 판단이라고 믿지 않겠습니까?”라는 물음을 통해 “물론”이라는 대답을 이끌어내는 대목이다. 테오도르스가 유도신문에 어처구니없게 당해버린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소크라테스가 그러한 질문을 던진 것은 역시 지혜와 앎과 참된 판단이 동일시되는 본질주의적 믿음에 사로잡혀 있는 소치라고 하거나 혹은 테오도로스의 아둔함을 이용할 만큼 지극히 악의적이었다고 해야만 하겠다(극작가 플라톤이 극의 이면에서 짓고 있을 음흉한 미소를 생각하니 사실 둘 중에 무엇 하나라고 단정하기가 어렵다. 둘 모두를 사용했다면 꼭두각시로 허수아비를 때리는 전술이라고나 해야할까?). 아무튼 이렇게 해서라도 앎과 지혜는 다시 봉합되어야만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앎이 지각으로부터 생각이나 판단, 또 지혜로까지 순조롭게 미끄러져 내려가야지만 프로타고라스를 반박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바로 뒤의 동일성이 수립되지 않는 참과 거짓에 관한 교묘한 논변으로 프로타고라스의 학설을 궁지로 몰아넣는가 하면, 장차 있을 것들에 관한 판단이 반드시 적중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냄으로써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라는 명제를 공략해낸다. 그러나 겉으로는 마치 학설 자체에 내재하는 근원적인 모순을 통해 학설이 스스로 무너져내린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과정에 은연중으로든 고의적으로든 소크라테스의 나쁜 버릇이 복병처럼 은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달리 말하자면 소크라테스가 논변을 펼치는 와중에 프로타고라스를 부당하게 대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는 꼭 맹신을 또 하나의 다른 맹신을 통해서 해치우려고 하는 형국이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학설을 말할 때조차 인간이 그것들에 대한 판정 기준(kriterion)을 자신 속에 지니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데(178b6), 이때 척도와 판정 기준은 같은 낱말이라 하더라도 서로에게 완전히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프로타고라스에게 척도란 만물이 인간에게 대하여 있는 그대로 있을 때의 인간의 주관 내지 그 주관과 다름 없을 지각 그 자체를 의미한다면 소크라테스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그것이 참이며 실제로 그렇게 있다는 것을 보증해주는 영혼 속의 재판관과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이야말로 사실은 이렇다 할 <참된 판단>으로 근거되지 않은 가정 혹은 맹신에 불과한 바, 정작 입증책임을 지어야 하는 쪽에서는――이건 자승자박이다――이러한 것들이란 신령한 것(daimon) 혹은 꿈이 알려준 것이라며 모호하게 얼버무리거나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표명>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한 발자국 떨어져서 고매한 훈수나 둘 수밖에 없는 것이다(이것을 두고 불임의 산파라고 일컫는다). 여기서 소크라테스의 믿음을 프로타고라스의 것으로써 대비하여 표현하자면, <앎이 만물의 척도이다>라는 것이 된다.
그러니 소크라테스 스스로도 감지했듯 앎을 규정하려고 드는 데에 있어 이미 참과 거짓을 판별하는 척도로서의 앎을 전제하고 있는 꼴이라서, 이내 무한 퇴진의 늪에 빠져들어갈 수밖에 없다. 앎이 무엇인가를 논하는 데에 있어서 무심결에 거짓 판단이니 실수이니 하는 말들을 뱉어대는 탓에――소크라테스의 버릇――연신 제 발에 걸려 넘어지는 것이다. 마지막에는 앎의 정의를 또 한번 비틀어 <설명을 동반한 참된 판단>이라는 식으로 가정하는데, 이 역시 영 신통치는 못하다. 여기서 설명에 해당하는 그리스어인 logos는《테아이테토스》에서 다의적으로 사용되는 낱말이다. 그런데 logos와 동근어인 logismos가《메논》에서 참된 판단들을 묶어내어 앎을 도출시키는 <원인의 추론>의 추론에 해당하는 그리스어임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플라톤은 이렇게 얻어낸 앎을 《메논》의 핵심어이기도 한 <상기>로서 간주하기 때문이다(주783). 이렇게 보자면 《테아이테토스》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설명(logos)이라고 함은 즉 수학적-논리적 필연성에 가까운 것일 테고, 이 필연적으로 참된 판단들을 도출해내는 능력은 레테에 의해 망각한 본질에 의한 것일 테다. 앞서 지적한 바, 소크라테스의 문제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적절한 답변은 그것의 본질(ousia)이지 속성(pathos)이 아니라는 것이지만, 플라톤에게 그것은 《메논》의 상기설로써 완전히 정당화되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소크라테스의 증상에 내재한 원리이다. 신령한 것이나 꿈 운운하는 겉보기에 임기응변적인 말투가 모두 치밀한 설계와 계산에 의한 극적 장치였거나 그렇지 않다면 스스로도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 무의식의 단편을 드러내는 모종의 진리였음이 이렇게 밝혀진다.
전자가 옳다면 플라톤이야말로 악의적이고 교활한 극작가라는 앞서의 의심이 비로소 확신으로 굳어지겠지만(정확히 그러한 점에서 플라톤은 철학자이다), 그의 꼭두각시 소크라테스는 《테아이테토스》의 지면 속에서 헤매도 너무 헤맸다. 그러므로 이를 순순히 철학적 이상과 본래적인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는 모험담으로 읽어내는 방식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다시 말하지만 플라톤의 철학적 이상은 이렇다 :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본질을 표현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 언어를 배울 때 우리는 그것을 정당화의 방식으로 배우지 않는다. 주지하듯, 이는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이다. 비트겐슈타인이야말로 철학적 이상을 품은 전기 철학으로부터 후기 철학으로의 이행 속에서 깊은 고뇌와 방황을 겪은 장본인임을 떠올리자. 그러나 이점을 차치하고서라도, 《테아이테토스》의 끝부분에는 흥미롭게도 요소명제의 문제가 시사되고 있다. 바로 다음의 대목이다 :
“일차적인 것들, 말하자면 그것들로부터 우리나 다른 모든 것들이 합성되는 요소들과 같은 것들은 설명을 지니고 있지 않을 것이네. 그 각각 그 자체는 그것 자체로는 오직 이름만 붙일 수 있을 뿐, 다른 아무것도 덧붙여 말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 테니까. (…) 일차적인 것들 중 그 어떤 것이든 간에 설명에 의해 서술되는 건 불가능하네.”(201e2)
이것은 이미 비트겐슈타인의 문제이다. 즉 : 요소명제는 말해질 수 없다. 위의 rhethenai(서술되는 건)에서 형성된 명사 rhema가 《소피스트》 261d-262a에서 <동사> 내지 <서술어>의 의미로 사용된다는 사실(주794)은 중요하다. 진술(logos)은 이름(onoma)과 서술어(rhema)의 결합에 의해서만 가능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요소(stoicheia)――이 낱말이 다의적이라는 사실은 기쁘다――혹은 비트겐슈타인의 요소명제와 같이 일차적인 것들은 자기 자신에 관한 서술어를 허용하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이 그의 개념인 대상이나 요소명제에 대해 단 한 가지의 예시도 제시할 수 없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 일차적인 것은 항상 주어에 머무른다. 다시 말해 이것일 뿐이지 무엇이 아니다.
<앎>이라는 이름에 대한 <설명적 정의>라는 것은 가능한가? 앎을 일차적인 것으로 본다면 당연히 불가능하고(혹은 불완전하고), 그렇지 않고 복합체로 본다고 하더라도 설명(logos)을 앞서 보았듯 수학적-논리적 필연성에 의거한 추론이라는 입장을 고수한다면 이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때 행해지는 추론은 내용을 결한 채로 전진이나 퇴진만을 거듭할 뿐인 순수한 필연성의 형식으로서, 전진의 끝에는 공허한 동어반복만이 남을 것이고 퇴진의 끝에는 다시 일차적인 것이 재림하여 우리를 벙어리로 만들어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명은 차라리 테아이테토스가 천재성을 발휘한 첫 번째 대답과 같다. 우리는 본래 언어를 제각기의 표현과 그 맥락에 깃든 쓰임을 통해서 배우는 바, 설명이란 오히려 근친적 유사성을 품고 있는 흐릿한 그림들을 무한히 열거하는 일에 가까울 것이다. 즉 <앎>을 위시한 낱말들은 엄밀한 정의로써 굳게 닫혀있기보다는 근친적 유사성으로써 열려 있다. 설명적 정의는 형용모순이다. 그럼에도 이를 이해할 수 없는 소크라테스에게 정의의 실패는 따라서 필연적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희극적인 장면이 벌어지기에 이른다 :
“실은 말이야, 테아이테토스, 우린 순수하지 못한 방식의 대화에 벌써부터 물들어 있었네. 우리는 셀 수 없을 만큼 여러 번 '우리가 인식한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가 안다.', '우리가 알지 못한다.'라고 말했으니까. 여전히 앎을 모르는 동안에도 뭔가 서로를 이해하고 있는 양 말일세. 원한다면 더 들어 볼까? 지금 당장에도 우리는 '모른다'뿐 아니라 '이해한다'는 표현을 다시 사용했네. 우리가 앎을 결여하고 있는데도 그런 표현들을 사용하는 게 적절한 일인 양 말일세”(196e1)
어떤 표현에 대한 앎을 결여하고 있으면서 그것을 사용하는 일이 부적절하고 파렴치하다거나 어떤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서 그것의 이름을 이해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과 같은 말투는 소크라테스의 버릇을 다르게 표현하는 방식이다. 소크라테스는 이 대목에서 이미 깨달았어야만 했다 : 자기 자신은 이미 <앎>을 알고 있다고, 그리고 <앎>을 아는 것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고. <앎>을 앎은 바로 지금과 같은 쓰임에서 이미 증명된다고.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병은 이미 말기이다(유감스럽게도 이 병 때문에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 이때 소크라테스가 스스로의 대화방식을 두고 순수하지 못하다고 말한 것은 무심결에 표명된 진리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물론 소크라테스는 본질을 알지도 못하고 낱말을 지껄인 여태까지의 수다를 두고 한 말이겠지만, 이로부터 우리는 순수함의 완전한 역전을 본다 : 소크라테스의 도착증은 본래의 모습으로부터 이데아계로의 불순한 비약이다. 플라톤은 여기서 자신의 죽음을 일순 스쳤다. 원래대로라면 《테아이테토스》는 바로 이곳에서 끝났어야만 한다.
무한 퇴진과 순환논증의 늪보다도 예상치 못한 복병으로부터 죽음을 스쳐간 소크라테스는 독자에게 인내와 관용을 구걸하며 끝내 <설명이란 차이점에 대한 해명>이란 가정까지 내세워 보지만, 이번에 소크라테스에게 닥친 문제는 언어적 정의가 마주하고 있는 테아이테토스와 같은 개별자를 완벽히 포착해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언어의 근본적인 문제이다. 언어 기호가 개별 사물을 완전히 그려낼 수 있기 위해서는 그것이 모든 사물들과 일대일로, 즉 같은 수만큼 존재하는 수밖에 없는데, 이렇게 되면 기호는 그 의미를 상실해 버릴 것이다. 사실을 보자면 개별성을 문그러뜨리는 추상화된 보편자, 이것이 다름 아닌 언어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는 <무엇인가는 무엇인가>에 관한 고민이다. 왜냐하면 언어가 자신의 이데아적 본질을 드러내는 정의를 구사할 수 없다면 차라리 오성의 법칙이라도 표현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를 일체화한 이들이 고대의 피타고라스 학파라고 불린다. 알다시피 플라톤 역시 이러한 입장을 그대로 이어받으며 시작하였지만 수학적 필연성으로서의 본질이 갖는 지위와 일반화의 문제에 관해서는 더욱 신중했어야 한다. 그러한 문제들이야말로 오성의 법칙에 내재하는 심각한 자기파괴적 고뇌이기 때문이다. 즉 : 만물에 일반화되는 순수한 법칙은 가능한가?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면 법칙은 그때에도 여전히 법칙인가? 무한한 세계의 닫힘, 이것이 정의(定義)의 이상(理想)이다.
그 반대 극을 소크라테스가 제기한 물음의 형식으로 뒤집어 표현하자면, 그것은 <앎이란 무엇이 아니다>라는 부정판단으로, 즉 유한한 그림의 열림이다. 이는 앞서 비트겐슈타인의 입장과 함께 언급한 바, 언어의 쓰임에 관한 본래적 모습, 원초적인 언어의 배움의 과정이다. 앞서 말했듯, 《테아이테토스》의 사안은 <앎이란 무엇인가?>였지만 그 대답으로 고개를 쳐든 것은 오히려 <앎이란 무엇이 아니다>라는 질문의 거절 혹은 <무엇인가는 무엇인가?>라는 되물음이다. 이 두 가지 답변은 각각 소크라테스의 우여곡절 속에서 우리가 목격한 본래적 언어와 언어의 이상이라는 대립되는 두 극에 해당한다. 테아이테토스와 소크라테스는 다름 아닌 이 두 극 사이에서 진동했다. 한나절 동안 앎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을 잉태하기 위해 그들은 어지러운 수다를 벌여댔다. 그러나 그들이 마침내 싸질러 놓은 것은 똥덩어리――아니 차라리 그들은 아무것도 산출해내지 못했다, 그들은 보기 좋게 유산했다. 이내 소크라테스가 서둘러 대화를 마치고 자리를 뜸으로써 대화편 자체는 일단락된다.
그러나 우리는 대화편이 덮인 이후에도 테아이테토스와 소크라테스처럼 두 가지 극들 사이에서 진동한다――그리고 그 운동은 이후의 이천여 년 동안 끈질기게 지속되었다. 아테네의 조그마한 진폭으로부터 파장은 오히려 불규칙한 방사형을 띠며 광활한 시공간으로 뻗어져 나갔다. 가령 앎이 비교적인지 그렇지 않은지에 관한 대립은 이곳 진원지에서 피어오르는 또 다른 지성의 재난들이다. 바야흐로 언어적 고찰이 자신의 빛을 비추는 곳에 벌써 될성부른 앎의 문제들이 움터 오르기 시작한다. 대화편 《테아이테토스》의 의의는 다름 아닌 여기에 깃들어 있을 것이다 : 앎의 문제는 곧 언어의 문제들 사이에서 격렬하게 요동친다는 사실. <앎이 무엇인가>, 혹은 <무엇을 아는가>에 관한 문제, 따라서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에 관한 문제, 이와 같은 것들이 실은 우리의 철학적인 말버릇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사실――소크라테스의 방황, 이 독법은 우리에게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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