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경은 그 남자들 중 누구도 미치거나 발정이 난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인간은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고독해지는 존재니까.」 「그제야 우리는 깨달았다. 서쪽으로 오렌지 빛 하늘이 잠기는 동시에 반대편에서 역청 빛 물결이 밀려드는 어스름의 풍경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까닭은 그게 종말의 풍경을 닮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날마다 하나의 낮이 종말을 고한다. 밤은 그 뒤에도 살아 남은 사람들의 공간이다.」 작년에 나온 지 얼마 안 돼서 진작 사놓고는 시간이 안 나서 어제서야 반 년 만에 읽었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카밀라, 혹은 정희재가 자신의 출생 - '진실'을 구성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찾아'가 아니라 '구성해'라고 표현한 것은 페이지를 넘길수록 계속 새로운 진실들이 드러나고, 최종적으로 그 진실들 중에서 어떤 것을 믿을 것이냐는 카밀라와 독자들의 선택이니까. 김연수는 서술자를 계속해서 바꿔가며, 독자에게 카밀라의 출생에 대한 진실들을 하나씩 던져준다. 그 진실들은 서로 비슷한 이야기인 경우도 있고, 반전이라 할 만큼 상반된 이야기인 경우도 있다. 때문에 복잡하고 어지럽기만 할 수 있으며 뻔한 흥밋거리용 추리소설이 될 수도 있는 글을, 특유의 인생을 꿰뚫은 듯한 묘사와 함께 섬세하게 정돈하고 조심스럽게 풀어내는 데서 김연수의 뛰어난 작가적 능력이 잘 드러난다. 카밀라의 아버지는 가장 슬픈 경우인 '그'일 수도 있고, 분노를 불러 일으키는 '그'일 수도 있고, 가장 나은 경우이자 마지막에 제시되는 '그'일 수도 있다. 김연수가 인터뷰에서 말했듯, 선택은 각자의 몫이지만 나는 가장 마지막을 택하고 싶다. 근거도 충분하고, 앞의 두 경우를 선택할 만큼 나는 사회와 세상을 슬프게 바라보고 싶지는 않으니까. 몇십 년 전의 여자를 위해 박물관을 만들었다는 그 낭만적인 사실만으로도 마지막을 택할 가치는 충분하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시의 구절처럼 희망이 날개 달린 것이라면, 사람들이 심연을 건너가기 위해 택하는 그 날개는 '각자가 구성해가며 서로 다른' 진실이 아닐까. 모든 '진실'이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면, 나는 ㅡ 적어도 아직까지는 ㅡ 가장 긍정적인 방향을 택하고 싶다. 아직 갓 스물의 티를 벗지 못한 나이에서 오는 치기일지도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