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은 동기는 조금 허탈하다. 나는 이 책이 '이강백'의 파수꾼인 줄 알았다. 그러나 전혀 다른 소설이었다. 책의 줄거리를 대충 요약하자면, 주인공인 미국 남부출신 여자 진 루이스가 평생 옳음의 기준으로 믿어왔던 자신의 아버지의 그릇된 모습, 인종차별적인 면모를 발견하고 충격을 받고 스스로의 내부 세계가 무너짐을 느끼고 아버지를 기준으로 한 정의가 아닌 스스로의 자주적 정의를 되찾게 되고, 또 후에 아버지의 속마음을 알게되며 나름의 행복한 결말로 마무리 지어지는 내용이다. 우선 책의 내용이나 담겨져있는 심오한 메세지, 또 이 작가의 필력이 얼마나 훌륭하고 문학적이며 기술적인지에 관계없이, 이 소설은 나에게 매우 읽기 어려운 소설이었다. 우선 당시 사회적 배경이나 역사적 사실에 대해 전혀 모르고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이 소설은 나의 가벼운 독서 의도와는 맞지 않게 매우 사회 비판적인 소설이었으며, 그 묘사는 대략 1900년대 중반의 미국 남부 특유의 문체를 담고 있어서 이해가 되지도 않았고, 머릿속에 소설의 모습이 그려지기도 쉽지 않았다. 이러한 애로사항에도 불구하고 줄거리 자체는 나름의 감동을 주었다. 이 소설의 전작인 '앵무새 죽이기'를 읽어보지 않아서 이 소설 주인공의 아버지인 애티커스가 얼마나 정의롭고 준법정신이 투철한 인물로 나오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책이 출간되었을 당시 애티커스의 인종차별적 행동이 묘사된 것을 보고 많은 독자들이 항의했다고 한다. 이 처럼 이 소설의 주요 주제 중 하나는 인종차별이다. 이 책에서 흔하게 등장하는 단어 중 하나는 니그로인데, 지금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 아마 이 단어를 쓴다면 숱한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은 인종차별에 대한 문제점이 수면위로 많이 드러난 상태이고, 흑인과 유색인종의 인권을 위한 많은 운동들도 공공연히 벌어지지만, 책의 시대배경에서는 흑인은 애초에 백인과 섞일 수 없는 별개의 종이며, 그들의 인권을 다시 나락으로 떨어트리기 위한 여러 집회가 벌어지고 있었다. 흑인과 함께 테이블에서 밥을 먹는 것에 놀라워하고, 흑인이 대학에 입학하는 것에 반대하기 위해 시위를 벌이는 그런 시대였던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어떠한 일화가 떠올랐다. 우리나라에서 흑인이나 동남아시아의 사람이 길을 물어보면 무시하거나 성의없이 대하고 백인이 길을 물어보면 못하는 영어까지 사용해서 길을 알려주는 일이 흔하다는 것이다. 반 백 년 전의 백인 여성인 주인공 진 루이스조차 인종이란 단순히 피부색이 다른 것일 뿐 그 외의 특권이나 차별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며, 이에 부정하는 자신의 부친에 대해 저항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정작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심지어 스스로를 백인보다 열등하다 비하하며 다른 유색인종들을 차별하는 우스운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조금 더 스스로 생각해보고 행동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또 이 소설의 주요 내용은 주인공 진 루이스가 아버지로부터 배신감을 느끼고 그제서야 스스로의 정의란 무엇인지 생각하는 장면이다. 이를 통해 나는 자주적인 삶과 의지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물론 남의 기준으로 세워진 정의로 사는 것이, 만약 그 사람의 정의나 사고가 올바른 것이라면, 무조건 고쳐야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내가 절대선이라고 생각한 그 기준에 아주 조금이나마 흠이 보인다면 그로 인해 세워진 나의 세계가 송두리째 흔들릴 수도 있다는 위험성에 대한 경계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물론 소설처럼 다른사람에 절대적으로 의지해서 자아를 이루는 사람은 흔치 않겠지만, 요즘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결정에 의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이 책을 읽어보고 자주적인 생각을 가지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느껴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스스로의 인생을 위해 오로지 나를 위한 정의를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태도를 갖도록 노력해보도록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