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금 제도로 살펴보는 사회법으로서의 노동법>
나는 2학년 1학기에 현대사회와 법을 수강했다. 공대생인 내가 교양과목으로 듣기엔 벅차지 않을까 싶기도 했지만 평소 나에게 세상살이를 모르고 어리다고 하는 주변인들 때문에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나는 자취를 해본 적도 없고 운전면허도 없고 아르바이트 경험도 없다. 뉴스를 즐겨 보긴 하는데 구속영장이니 기각이니 하는 말들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했다. 좋게 말하면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라온 나는 너무 무지했던 것이다. 현대사회와 법 수업을 통해 나는 많이 '어른'스러워졌다. 내가 사는 곳이 어떤 규칙을 갖고 움직이는지 대충 알게되었고, 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법적으로 어떤 보호를 받을 수 있는지 배웠다. 그 후 학교 도서관 hot book 코너에서 ‘판결을 다시 생각한다’라는 책을 발견했다. 김영란법으로 유명한 김영란 판사의 책이라 관심이 가서 무작정 빌려 읽게 되었다. 이 책은 논쟁이 치열했던 열 가지 판결들에 대해 설명하고 각 입장에서 추구하는 가치를 비교한다. 특히 나는 퇴직금 분할 지급 사건 파트를 흥미롭게 읽었다. 고령화 시대인 지금, 모든 직장인들은 퇴사 후에 어떻게 생활을 유지할 것인지 고민한다. 나도 취업 걱정을 하면서 동시에 퇴사 걱정까지 하고 있기 때문에 공감이 간다. 이런 상황에서 퇴직금제도는 근로자의 퇴직 후 노후생활을 보장해주는 중요한 제도라고 생각한다.
퇴직금 분할 지급 사건이 왜 법적으로 문제시되는지 알아보기 전에 우선 퇴직금 분할 지급과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 제8조 제2항이 규정하고 있는 퇴직금 중간정산 제도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퇴직금 제도는 애초에 ‘후불성’을 원칙으로 한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퇴직금 중간정산이 인정되는 경우가 있는데, 근로자의 명시적인 요구가 있고, 중간정산 대상이 되는 기간이 장래 근로할 기간이 아니라 이미 근로한 기간이면 중간정산으로 인정된다. 반면 퇴직금 분할 지급은 이미 경과한 계속근로기간을 전제로 하지 않고 각 월급 또는 일당에 양 당사자가 합의한 금액을 퇴직금으로 포함시켜 지급하는 것이다.
다루고자 하는 퇴직금 분할 지급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총사원회의를 통해 연봉제를 도입하면서 근로자와 사용자가 퇴직금을 포함한 연봉 총액을 합의하고 이를 명시한 연봉계약서에 근로자가 자필로 서명을 했다. 그런데 이후에 근로자가 퇴직금 청구 소송을 제기하고 사용자는 퇴직금분할약정을 주장하며 반소를 했다.
이 사건에 대한 하급심의 판결은 “퇴직금분할 약정을 퇴직금 중간 정산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근거로는 위에 언급했던 중간정산의 두 가지 요건이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봉계약서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만으로 근로자의 적극적인 요구가 있었다고 볼 수 없고, 해당 연도에 발생할 퇴직금을 그 행의 월급에 미리 나누어 지급했으므로 적법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퇴직금이라는 명목으로 지급한 이 돈을 그렇다면 임금으로 보아야 하는지, 부당이득으로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첨예하게 엇갈려서 대법원 전원합의체에 회부되었다. 나는 당연히 부당이득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용자와 근로자, 이 두 사람이 연봉계약을 맺은 것은 사실이니까 위법인 부분인 퇴직금분할지급은 무효로 하되 개인 간의 계약을 존중하여 받은 퇴직금을 사용자에게 다시 돌려주어야 사용자의 입장에서 억울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다수의견도 부당이득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소수의 반대의견 근거를 찾아보면서 내가 간과했던 부분을 깨달았다. 바로 부당이득으로 취급한다면 사용자는 퇴직금분할지급을 하고서도 어떠한 손해도 받지 않게 되는 판례가 나오게 되는 것이니 이후에 악용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퇴직금 분할 지급을 통해 사용자로서는 근로자의 퇴직 시에 일정한 목돈을 한꺼번에 지급하여야 하는 부담을 피할 수 있고, 월급 또는 일당에 퇴직금을 분할하여 지급한다는 명목 하에 실질적으로는 근로자의 임금을 전체적으로 하향 조정할 수도 있다. 결국 미리 지급한 퇴직금을 부당이득으로 보아 사용자에게 돌려준다면 퇴직금 제도의 본래의 취지에 어긋나는 판결이며, 퇴직금 분할 지급 자체를 인정하는 것과 같은 결론을 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를 임금으로 보는 것이 맞는가. 사용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억울할 것이다. 분할 지급하겠다는 것은 근로자도 동의한 계약 내용이었으며, 퇴직금 지불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분할해서 지급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법원은 결국 퇴직금 분할 지급에 관해 다음의 요건들을 만족하여야만 부당이득으로 취급하기로 하였다. 우선, 사용자와 근로자 사이에 퇴직금 분할 지급에 대한 합의가 있어야 한다. 또한, 임금과 구별되는 퇴직금 명목의 액수가 명시되어야 하고, 퇴직금 액수를 제외한 임금이 근로기준법에 비추어 근로자에게 불이익이 되지 않아야 한다.
위 사건과 같이 노동자와 사용자 간의 법적 분쟁은 판결하기에 난감한 부분이 있다. 개인 간의 계약을 어디까지 인정해주어야 할지, 어디까지 근로자를 보호해주어야 할지 애매하다. 그 이유는 사용자가 민법에서 정의하는 일반적인 채권자가 아니라 노동법으로 불리는 민법의 특별법에 영향을 받는 특수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노동법을 자유시장경제의 기본 원칙과 민법이 보장하는 계약의 자유를 거스르는 법이라고 한다. 나도 수업시간에 근로기준법에 대해 배우면서 어떻게 보면 ‘근로자’에게 치우친, 조금은 불공평한 법이라고 생각했다. 휴업 중에도 사용자는 근로자에게 수당을 지급해야 하는 경우도 있고, 매년 증가하는 최저임금 제도를 따라야 하며, 사용자의 잘못이 아님에도 산업재해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 내가 고용주라고 입장 바꿔 생각해보면 노동법은 나를 제한하고, 구속하는 법으로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노동법을 따르고 발전시켜야 하는 이유는 공익적 이유가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근로자는 사용자에 비하여 불리한 입장일 수밖에 없다. 1950년대-60년대 노동자의 권리가 보호받지 못하던 시절을 떠올려보자. 노동자들은 고용주에 의해 하루 대부분을 일하고, 그에 대응하는 임금을 받지 못했으며, 작업환경의 안전성도 보장되지 않았다. 현대에 이르러 노동법이 발전함에 따라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근로자들이 더 행복하게 일할 수 있게 환경이 개선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공공의 이익에 기여했기에 노동법은 보존되어야 하는 것이다.
노동법은 공법과 사법의 중간 영역인 사회법이라고 한다. 때로는 사법의 원리로, 때로는 공공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공법의 원리로 적용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판결을 다시 생각한다’라는 책에서 저자가 언급한 ‘로크너 판결’은 사회법적인 시각이 필요한 사건에서 사법의 원리로만 해석한 사례이다. 이 사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895년 미국 뉴욕 주 의회가 제과점 노동자의 작업시간을 하루 10시간, 주당 60시간으로 제한한다는 법령을 통과시키자, 제과점을 경영하던 조지프 로크너가 이 법령이 계약 자유의 원리를 침해한다며 뉴욕 주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주법원과 연방법원에서는 로크너가 패소했으나 1905년 연방대법원은 로크너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 판결은 후에 미국 역사상 최악의 판결로 뽑힌다고 한다. 개인의 자유가 존중되어야 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모든 계약에서 당사자들 간의 주체적인 합의가 있었다고 그 계약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장기매매 계약, 성매매 계약 등에서 아무리 당사자들이 개인의 자유로, 자의로 계약을 맺었다고 해도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 질서에 관한 법률로 인해 무효가 된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근로자와 사용자의 관계에서는 개인의 자유보다는 약자를 보호하고 공익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법을 적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위에서 다룬 퇴직금 분할 지급 판결에서도 사법적 원리뿐만 아니라 사회법적인 시각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고령화와 노후 복지 문제가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퇴직금 제도의 본래의 취지를 손상시키는 퇴직금 분할 지급 행위는 사회법적으로 더 생각해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