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언덕』의 원제는 이 책의 배경이 되는 '워더링 하이츠(Wuthering Heights)'이다. "'워더링'이란 이 지방에서 쓰는 함축성 있는 형용사로, 폭풍이 불면 위치상 정면으로 바람을 받아야 하는 이 집의 혼란한 대기를 표현하는 말이다." (p. 9) 워더링 하이츠가 거센 북풍을 정면으로 받는데도 무사할 수 있는 이유는 건축가가 그것을 고려하여 튼튼하게 지었기 때문이라고 적혀 있다. 이와 유사하게 워더링 하이츠의 인물들은 그야말로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갈등 속에 놓이게 된다. 그럼에도 그들이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튼튼한 집처럼 뿌리 깊게 자리한 일말의 인간성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나는 어렸을 적에 읽은 이 책을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애절하고 안타까운 사랑'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다시 읽어보니 내가 같은 책을 읽은 것이 맞나 생각이 들 정도다. 이 책에는 막연하게 기대했던, 아름다운 언덕을 배경으로 한 낭만적인 분위기는 없었다. 한마디로 하면 "음울한 열정"(p. 158)이라는 표현이 더 가까웠다. 묘사들은 악귀의 억센 손아귀 같았고, 인물들은 표독스러웠고, 대화들은 신랄하게 느껴졌다. 영화 〈장화, 홍련〉처럼 어두운 집과 음산한 가족을 배경으로 한 공포물로 만들면 어떨까 싶었다. 오죽하면 책의 후반부에는 '히스클리프'나 '워더링 하이츠'라는 단어만 봐도 마음이 갑갑해지고 울화가 치밀었을까.
그러나 히스클리프가 완전히 악마는 아니며, 그런 히스클리프를 사랑한 캐서린도 이해 못할 인물은 아니다. 이 글에서는 워더링 하이츠를 둘러싼 인물들을 '유사성' '동일성' 그리고 '인간성'을 키워드로 분석할 것이다. 그것은 '이 책이 왜 액자식 구조를 취하고 있는가'라는 질문과 맞닿아 있다. 따라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는 것이 책에 대한 분석도 된다.
주제 의식을 암시하는 액자식 구성
이 책에는 삼대에 걸친 인물들이 등장했다가 죽어나가지만, 두 주연을 꼽자면 캐서린과 히스클리프라고 할 수 있다. 작품의 중심이 되는 사건도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사랑, 그리고 히스클리프의 복수이다. 서로에게 불타오르는 열정을 생각하면 두 사람만을 초점으로 하는 장면이 요구될 법도 한데 캐서린과 히스클리프는 도저히 단 둘이서 한 공간 안에 자리잡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 둘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사람이 가정부인 넬리라는 데 있다. 이 넬리가 1인칭의 화자로 설정되었기 때문에 중요한 대화의 순간마다 넬리가 끼지 않는 곳이 없다. 넬리는 마치 〈겨울왕국〉의 두 주연에게 집중되어야 할 마지막 순간에 병풍처럼 서 있는 올라프처럼 거슬리는데, 올라프가 시덥지 않은 대사를 던져 얼어붙은 왕국의 분위기를 한층 더 싸늘하게 만든 것과는 달리 넬리라는 인물이 두 주연 사이에 끼어든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자.
한편 액자 밖에서 넬리의 이야기를 듣는 1인칭 화자는 록우드이다. 이 서평에서 '나'라고 칭해지는 것 역시 록우드이다. 『폭풍의 언덕』 첫 장을 펼치면 '나'가 워더링 하이츠가 있는 한적한 고장에 막 도착해서 히스클리프를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1801년 ― 집주인을 찾아갔다가 막 돌아오는 길이다. 이제부터 사귀어가야 할 그 외로운 이웃 친구를. 여긴 확실히 아름다운 고장이다. 영국을 통틀어도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이렇게 완전히 동떨어진 곳을 찾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사람을 싫어하는 자에겐 다시없는 천국이다. 더구나 히스클리프 씨와 나는 이 쓸쓸함을 나누어 갖기에 썩 알맞은 짝이다. 멋진 친구! 말을 타고 다가가는 나를 보고 그의 시꺼먼 두 눈이 눈썹 아래에서 미심쩍게 찌푸려지는 것을 봤을 때, 그리고 내가 이름을 대자 그의 손가락들이 잔뜩 경계하며 조끼 속으로 더욱 깊숙이 들어갔을 때, 내 가슴이 얼마나 그에게 호감을 품었는지 그는 상상도 못 했으리라. (p. 7)
주의 깊게 살펴보면 이상한 점이 눈에 띈다. 록우드가 이 아름답고 적막한 고장으로 찾아온 까닭은 이곳이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이렇게 완전히 동떨어진 곳" "사람을 싫어하는 자에겐 다시없는 천국"이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제4장으로 가면 이것이 명시돼 있다. '나'는 "세상과 모든 관계를 끊으려 결심하고 마침내 관계를 가지려야 가질 수도 없는 장소를 발견"(p. 55)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고장에 도착하자마자 히스클리프라는 '친구'를 찾아나선다. 관계를 끊으려고 간 곳에서 관계를 만들려 하는 것은 일견 모순이지만,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는 사람이 질려 고독에 스스로 틀어박히면서도 그 와중에 인간적인 정을 찾는다. 특히 자신과 비슷한 마음을 가진 사람(혹은 가졌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사람)에게 더 친밀함을 느끼고 친구가 되려 한다. 히스클리프가 사람을 경계하고 싫어한다고 생각했을 때 그에게 더 호감을 갖는 '나'의 모습을 보자. '그와 나는 닮았다'는 유사성은 친밀함의 시작이자, 이 작품의 열쇠이기도 하다.
유사성의 발견이 우정의 시작이라면, 동일성의 발견은 진정한 사랑이다. 이는 서평의 첫 머리에 인용한 캐서린의 대사에서 암시된다. 멋진 글귀니 다시 한 번 가져오도록 하겠다. "내가 바로 히스클리프야. 그는 언제까지나,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있어. 나 자신이 반드시 나의 기쁨이 아닌 것처럼 그도 그저 기쁨으로서가 아니라 나 자신으로서 내 마음속에 있는 거야." (p. 136) 나는 이 글귀를 천천히 눈으로 짚어보고, 소리내어 읽어보기도 했는데 다른 독자들도 그렇게 해보았으면 좋겠다. 사랑에 대한 캐서린의 이해는 '더 이상 설렘이나 떨림이 없는 사랑이 사랑일까요?'라는 흔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히스클리프의 복수와 그 해소
이제 히스클리프의 복수에서 유사성이 어떤 기능을 발휘하는지 살펴보자. 그의 복수의 대상은 누구일까? 워더링 하이츠에 살고 있는 '언쇼 가(家)'와 드러시크로스 저택에 살고 있는 '린튼 가(家)'다. 민음사 작품해설에서도 나오지만 언쇼 가로 대표되는 워더링 하이츠는 야생의 세계를, 린튼 가로 대표되는 드러시크로스 저택은 문명(교양)의 세계를 상징한다. 히스클리프는 처음에 워더링 하이츠에도 드러시크로스 저택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제3자로서 워더링 하이츠에서 길러진다. 잘 양육되면 번듯한 젊은이가 될 수도 있었던 히스클리프는 학대당하고 핍박받으면서 야생적인 아이로 자라난다.
그렇다면 히스클리프가 언쇼와 린튼, 두 가문을 멸절시키려고 결심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언쇼 가에게 복수하려는 외적인 이유는 어린시절 받았던 심한 학대에 있다. 히스클리프가 겪은 아동폭력은 캐서린의 오빠 힌들리 언쇼에 의해 행해진다. 히스클리프는 힌들리뿐만 아니라 그 아들인 헤어튼 언쇼에게까지 자기가 겪은 학대를 돌려주겠다는 결심을 한다. 한편 린튼 가에게 복수하려는 외적인 이유는 그가 사랑하는 캐서린이 에드거 린튼과 결혼했기 때문이다. 캐서린은 결혼 의사를 넬리에게 밝히면서 히스클리프는 천하고 격이 떨어지는 야생적인 인간이기 때문에 결혼할 수 없다고 하고, 히스클리프는 이것을 엿듣게 된다. (그러나 이어지는 자신에 대한 캐서린의 사랑 고백은 듣지 못하고 나가버린다. 그리고 교양 있는 린튼 가가 살고 있는 드러시크로스 저택을 멸망시키겠다는 계획을 품고 집을 떠난다. 가출했다 3년 만에 다시 돌아온 히스클리프가 '교양'을 장착한 신사가 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런데 캐서린에 따르면 "저 방에 있는 저 고약한 사람(힌들리 언쇼)이 히스클리프를 저렇게 천한 인간으로 만들지 않았던들 내가 에드거와 결혼하는 일 같은 것은 생각지도 않았을" (p. 133) 것이기 때문에, 좀더 근본적이고 선행적인 이유는 린튼 가가 아닌 언쇼 가에 있다.
한편 처절한 복수를 계획하게 된 내적인 이유도 있다. 그것은 히스클리프가 무뚝뚝하고 내성적인 성격이라는 데 있다. 앞서 말했듯 캐서린이 넬리에게 하는 이야기를 엿듣던 히스클리프는 중간에 나가버렸기 때문에 정작 중요한 사랑 고백은 듣지 못한다. 상대방의 의견을 오판하고 대화를 시도하지도 않은 채 회피한 것이다. 캐서린 또한 당사자인 히스클리프가 아니라 넬리라는 인물에게 간접적으로 사랑을 전달했다는 점에서 일종의 회피를 했다는 잘못이 있다. '직시'와 솔직한 마음의 '털어놓음'이 관계 형성에 얼마나 중요한지는, (책을 끝까지 읽었다면) 캐서린-히스클리프와 헤어튼(小)-캐서린(小) 커플의 결말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히스클리프가 캐서린의 말을 끝까지 들었거나, 말을 중간에 끊고 들어와 말싸움이라도 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히스클리프의 이 성격은 얼마간 학대에서 형성된 것이라고 넬리는 말한다. "히스클리프는 무뚝뚝하고 참을성 있는 아이 같았어요. 아마 학대를 받아서 굳세어졌겠지요." (p. 63) 그렇기에, 내가 외적 이유와 내적 이유를 분리하긴 했지만 어느 영역에서나 그렇듯 안과 밖이 상호 간에 영향을 주고받으므로 각 이유들이 배타적으로 작용한 것은 아니다.)
'직시' '드러냄'이 긍정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워더링 하이츠의 작중인물들이 서로 물고 뜯고 싸우는 것도 그리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이들은 직설적이고 회피라곤 하지 않으며 상대방이 악을 쓰고 저주를 퍼부으면 자신도 똑같이 악을 쓰고 저주를 퍼붓는데, 그 과정에서 긴장이 끊임없이 해소되기 때문이다. 불안을 일으키는 것은 생각이나 감정들이 '감추어질' 때이다. 히스클리프의 무뚝뚝한 성격은 자신이 당한 일들에 대한 복수심을 쌓아두는데, 그 감정은 언쇼와 린튼의 자식까지 학대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할 만큼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난다. 다음에 이어지는 넬리의 말이, 드러내놓고 하는 멸시나 저주의 말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긴장과 불안을 고조시키는 것은 그 때문이다.
(…) 제가 타이르자 그는 쉽게 말을 들었어요. 원하던 것을 가진 이상 그밖의 일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거지요. 정말이지 그는 그 정도의 일로는 좀처럼 불평을 하지 않아서 저는 그가 진심으로 복수심을 품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어요. 그런데 나중에 이야기를 들으시겠지만 제가 감쪽같이 속았던 거랍니다. (p. 67)
넬리는 '감춤'과 반대되는 숨김없고 솔직한 '드러냄'의 가치를 히스클리프에게 직접 말하기도 한다.
"그 시무룩한 주름살을 활짝 펴고 눈꺼풀을 솔직하게 뜨고 악마 같은 두 눈을,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고 누구든지 분명한 적이 아닌 경우에는 친구라고 생각하는, 숨김없고 순진한 천사와 같은 눈으로 바꾸도록 힘써. 발길에 채는 것이 당연한 벌이라는 것을 아는 듯하면서도 그 아픔 때문에 발로 찬 사람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미워하는 사나운 똥개 같은 얼굴은 하지 마." (p. 95)
따라서 히스클리프가 복수를 내려놓는 과정에는 '숨김없는 드러냄'이 필요하고, 히스클리프가 자기 마음을 '털어놓는' 행위는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심장한 일인 것이다.
그렇다면 히스클리프는 왜 복수를 내려놓게 되었는가? 미리 예고했듯이 유사성의 발견이 그 이유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복수의 대상이었던 언쇼 가의 헤어튼(小)과 린튼 가의 캐서린(小)에게서 자신이 사랑했던 연인 캐서린의 모습과 닮은 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복수자 히스클리프의 입장에서는 헤어튼(小)과 캐서린(小)이 행복하고 잘 지내는 꼴은 못 보는 게 당연하다. 히스클리프의 바람대로 두 사람은 워더링 하이츠에서 지옥 같은 생활을 하고 서로 앙숙이 된다. 그런데 어떤 계기로 둘은 가까워지게 되고 어느 날 히스클리프가 이 모습을 목격한다.
그들은 똑같이 눈을 들어 히스클리프 씨의 얼굴을 마주보게 되었어요. 아마 아직 눈여겨보신 일이 없겠지만 그 두 사람의 눈은 아주 많이 닮았고 돌아가신 아씨의 어미님, 캐서린 언쇼 아씨의 눈 그대로랍니다. (p. 537)
그렇게 아씨를 닮은 점이 히스클리프 씨의 마음을 너그럽게 한 것이 아닌가 저는 생각합니다. (p. 537)
닮음(유사성)이 히스클리프 마음속에서 잠을 자고 있던 인간성을 일깨운 것이다. 따라서 책의 처음, 액자 밖의 '나'가 히스클리프와 자신을 비슷하다고 생각해서 친밀함을 느끼는 장면은 이를 예고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폭풍을 정면으로 받아도 튼튼하게 버티는 워더링 하이츠의 모습에서도, 학대와 고통 속에서 버티고 서 있는 인간의 모습이 연상된다. 복수가 아니라 사랑이 본질이라는 것을 깨달은 히스클리프는 사랑의 완성을 위해 워더링 하이츠를 떠난다. 한편으로는 자신과 캐서린의 불멸의 사랑을 위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헤어튼(小)과 캐서린(小)의 싹트는 사랑을 위해서.
가정부 넬리가 액자 속의 화자로 등장하는 것도 이와 관련해서 이해될 수 있다. 일관적으로 냉정하고 서로를 경멸하는 워더링 하이츠 내부에서도 가정부들(넬리와 질라)만큼은 인자하고 동정심 많은 인간적인 존재로 나타난다. 이들 가정부는 또한 유모였으므로, 아이의 인간성이 제대로 자리 잡도록 양육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 중 한 명인 넬리가 이야기의 전달자가 된다는 것은, 냉혹한 환경 사이에서 계속 살아남아 '이야기되는' 인간성을 강조하는 게 아닐까.
(이 글은 제 블로그 http://blog.naver.com/swsin12에 17년 2월 12일 작성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