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거울'
“만약에 자네가 거울을 들고서 어디고 돌아다니기만 한다면, 아마도 가장 신속하게 만들어낼 수 있을 걸세. 곧바로 해와 하늘에 있는 것들을 만들어 낼 것이며, 곧바로 땅과 자네 자신, 여느 동물들과 도구들, 식물들, 그리고 그밖에 방금 언급된 모든 것도 만들어 낼 걸세.” 내가 말했네.
“네. ‘보이는 것들’은 만들 수 있죠. 그렇지만 진실로 ‘있는 것들’을 만들 수는 없겠죠.” 그가 말했네.
“훌륭하이.” (국가, 스테파누스 596e)
회의는 전쟁의 피 섞인 눈물을 먹고 자랐다. 처절한 패배는 스스로 “우리 도시 전체는 헬라스의 학교”라고 자부하던 아테나이의 빛나는 성취와 영광을 모조리 삼켰다. 전후의 혼란과 참주정을 거쳐 다시 민주주의를 되찾은 아테나이의 어수선한 상황을 살았던 유력가의 자제 청년 플라톤. 어쩌면 그는 그가 마주해야 했을 ‘죽음’이 아니었다면 여느 평범한 그리스 정치인으로 남아 우리의 기억과 일상 속에서 떠오르는 일조차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꿈 많은 청년의 위대한 스승이었던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들었고, 플라톤은 절망의 잔재로부터 새로운 삶의 궤적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그의 손에 의해 다시 살아나, 소피스트들을 ‘사냥’하기 시작한다.
플라톤에 의하면 소피스트들은 ‘의견에 의한 모방술(doxomimetike)’을 구사하는, “앎이 있는 자들에 속하기보다는 모방하는 자들에 속하는” 이들로써 “공공연히 긴 논의를 통해 대중을 상대로 기만하는 자들”에 불과했다. (소피스테스, 스테파누스 267e ~ 268b) 그들은 진실로 ‘올바른’ 것과 ‘혼’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는 대신, 변증술과 같은 ‘기술’을 가르치기에 바빴다. 그들은 “어느 경우에나 극단적으로 나가며, 고함을 지르면서 박수를 해댐”(스테파누스 492c)으로써 젊은이들을 그들과 닮게 만들었다. 더 나아가 “교육자들이며 소피스테스인 이들은 말로써 설득하지 못할 경우에는, 행동으로써 강제적인 제재”를 가함으로써 “시민권 박탈(atimia)과 벌금, 그리고 사형에 의해 처벌”(스테파누스, 492d)할 뿐이다.
그랬기에 트라시마코스로 대변되는 소피스트들이 가진 국가와 정의에 대한 생각 역시 다분히 ‘현실적’일 수밖에 없었다. “올바른 것(to dikaion)이란 ‘더 강한 자’(ho kreitton)의 ‘편익(to sympheron)’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스테파누스 338c), “올바름 및 올바른 것이란 실은 ‘남에게 좋은 것’(allotrion agathon), 즉 더 강한 자 및 통치자의 편익이되, 복종하며 섬기는 자의 경우에 있어서는 ‘자신에게 해가 되는 것’(oikeia blabe)”에 불과하다고(스테파누스 343c,d) 일괄하는 트라시마코스의 목소리는, ‘마치 야수처럼, 혼신의 힘을 가다듬어 찢어발기기라도 할 듯이’(스테파누스 336b) 덤벼오는 것처럼 묘사된다. “어떤 사람이 시민들의 재물에 더하여 그들 자신마저 납치하여 노예로 만들게 될 땐, 이들 부끄러운 호칭 대신에 행복한 사람이라거나 축복받은 사람으로 불린다”(스테파누스 344a)라는 그의 말에는, 어쩌면 그 자신이 봤을지도 모를 아테나이의 현실이 적나라하게 담겨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소피스트들의 생각에 영향을 받은 것처럼 그려지는 (플라톤의 형이자) 아리스톤의 아들인 아데이만토스와 글라우콘으로 대변되는 젊은이들 역시 말한다. 인간이란 ‘금반지’(기게스의 반지)를 끼게 되면 언제든지 “왕비와 간통을 한 후에, 왕비와 더불어 왕을 덮쳐 살해하고서는, 왕국을 장악”(스테파누스 360b)할 수 있는 존재들에 지나지 않는다고. 거기에도 역시, 아무리 올바른 사람이어도 올바르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결국 망가지고 말 것이란 절망이 깃들어져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 대한 소크라테스(혹은 플라톤의) 인식은 다소 냉혹하다. 선박의 비유를 통해서 그는 그의 시대를 “아무도 일찍이 그 기술을 배운 적도 없고, 자신의 선생을 내세우지도 못하며, 자신이 그걸 습득한 시기도 제시하지 못하는” 이들이 서로 키의 조종과 관련해서 싸우며, “언제나 이 선주를 에워싸고서는 자신들에게 키를 맡겨 주도록 요구하며 온갖 짓을 다 하며”, “자신들은 설득에 실패하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설득에 성공하게라도 되면, 그들을 죽여 버리거나 배 밖으로 던져 버리거나 하네”라는 표현으로 묘사한다. 이들은 ‘참된 키잡이’와 관련해서 “한 해와 계절들, 하늘과 별들, 바람들, 그리고 그 기술에 합당한 온갖 것에 대해 마음을 쓰는 게 그에게 있어서 필연적”이라는 것조차 모른다. 그들은 그저 선주를 ‘최면제나 술 취함’ 등으로 옴짝달싹 못하게 한 다음 술을 마치고 잔치를 벌이면서 항해하는 자들이다. 이런 시대에서는 “정작 조타술에 능한 사람은 천체관측자나 수다쟁이, 심지어는 쓸모없는 사람”으로 불린다. (스테파누스 488b ~ 489a)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런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회의할지언정 절망하진 않는다. 고통 속에서 그림자와, 물속에 비친 사람들이나 다른 것들의 상(eidolon)을 넘어 모든 것의 원인이 되는 탓(aitos)으로써의 ‘태양’마저 관조했음에도 다시 동굴로 내려와 이전과 같은 자리에 앉는 사람(스테파누스 516b ~ 516e)처럼, 소피스트들에 맞선다. 그는 그것을, 자신이 생각해낸 상상을 통해 보여준다.
소크라테스는 우선 “스스로 통치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을 경우에, 그에 대한 최대의 벌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 통치를 당하는 것일세”(스테파누스 347c)라는 말을 통해 ‘참된 통치자’(alethinos archon)는 다스림을 받는 쪽에 편익이 되는 걸 생각할 것이라는 말로 트라시마코스를 반박한다. 이어 소크라테스는 의술과 조타술의 예를 통해 올바름과 훌륭함의 관계를 끌어낸 후, 올바름을 설명함에 있어 “어떤 기능이 부여되어 있기도 한 각각의 것에는 ‘훌륭한 상태(arte)’ 또한 있다”(스테파누스 353a)는 말을 통해 올바른 혼을 가진 사람이 더 잘 살게 될 것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그에게 올바름이란 “장차 축복 받는 이로 되고자 하는 이가 그 자체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에서 생기는 결과 때문에도 좋아지기 마련인 그러한 종류의 것에 속하는” (스테파누스 358a) 것이다. 이어 그는 아데이만에게 “올바름(dikaiosyne)엔 한 사람의 것도 있지만, 나라(polis) 전체의 것도 있다”고 말한 뒤, “올바름은 한결 큰 것에 있어서 더 큰 규모로 있을 것이며, 또 알아내기도 더 쉬울걸세”라는 말을 통해 이들에게 올바름을 보여줄 수 있는 모델로써의 국가(polis)의 상을 제시하기 시작한다.
플라톤이 그려내는 정체(politeia)는 “제화공이 동시에 농부가 되려고 하는 것도, 직물 짜는 이나 집 짓는 이로 되려고 하는 것도 말리고, 오직 제화공이도록만 했는데, 이는 다름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어 제화 기술의 일(ergon)이 훌륭하게 수행되도록”(스테파누스 374b) 하는 체제다. (즉 기능에 의해, 제자리에 맞는 이들에 의해 돌아가는 이 정체에서는) 농부나 다른 기술 등에서 종사하는 모든 부류들은 ‘성향에 따라서(kata physin)’에서 분리되며, 국가(polis)는 친구인 사람들에게는 있어 온유하지만 적에게는 가차 없는 나라의 수호자들(phylakes)이 지킨다. (티마이오스, 스테파누스 17c ~ 18a) 수호자들은 금은을 포함 일체의 사유 재산을 갖지 않으며, 생활필수품은 시민들에게 연간 수요량을 초과하지 않는 선에서 지원 받는 수준으로 유지되고, 공동 식사를 하면서 야영하는 군인들과 마찬가지로 공동으로 생활한다. (스테파누스 416d ~ 417a)
모든 것을 공동으로 하는 정체에서, 여성들 역시 남성들과 같은 목적으로 이용되기 위해 – 즉, 수호자가 되기 위해 - 남성들과 같이 시가와 체육 두 교과목(techne)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스테파누스 451e, 452a). 공동의 주거와 식사, 개인적인 소유가 없는 상황에서 이는 자연적 필연성(ananke)에 의해 상호 성적인 관계로 유도되며, “통치자들은 최상급이여야만 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에 “성스러운 혼인은 가장 유익한 혼인”이 돼야 한다.(스테파누스 458d ~ 459c) 이를 위해 소크라테스는 통치자들은 결혼 과정에서의 추첨 등을 통해 “이익을 위해서 많은 거짓말과 속임수를 씀으로써” (스테파누스 459d) 더 좋은 통치자들이 나올 수 있는 환경을 유지하고, ‘친구들의 것들은 공동의 것’(koina ta philon)이란 말로 대변되는 처자의 공유(koinonia)를 통해서 “‘내 것(to emon)’과 ‘내 것이 아닌 것(to ouk emon)’의 구분이 없는 전체적 공동 관계(koinonia)를 이뤄 (스테파누스 462c ~ 462d) 모두가 최대한 공감 상태(homopatheia)에 있게 돼야 한다고 보았다. 아울러 그는 열등한 사람들의 자식들은 다른 시민들 사이에 은밀히 분산시키고 살펴보되, 가치가 있는 자들의 신분은 올리고, 대신 그들(통치자들) 사이의 무자격자들을 내리는 일이 필요하다고 덧붙인다. (티마이오스, 스테파누스 19a) 소크라테스에게 있어 신분, 성별의 제약보다는 통치자의 자질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수호자들은 “시가(mousike)와 체육(gymanstike)을 통해 혼의 격정적인 면(to thymoedies)과 지혜를 사랑하는 면(to philosophon)이 적정할 정도로(to posekon) 조장되고 이완됨으로써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스테파누스 412a) 배우며, 산술(logistike)과 수론(arithmetike), 기하학(geometria), 천문학(astronomia), 화성(harmonia), 변증술(dialektike) 등의 교육(paideia)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스테파누스 525a ~ 535b) 이러한 교육은 20세 이전의 필수적인 체육 교육이 끝난 후, 가장 민활한 것으로 드러난 자들을 선발한 뒤 10년 동안의 과정을 통해 ‘교과 상호간의 친근성 및 ’실재(to on)’의 본성(physis)에 대한 ‘포괄적인 봄(synoptikos)’을 갖도록 해야 한다. 5년 동안의 논변에 대한 교육을 거친 후, 15년간의 관직과 전쟁 경험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지를 확인받아야 한다. 이들은 좋음 그 자체(to agathon auto)를 일단 보게 된 이들이기에 그를 본(paradeigma)으로 삼아 나라의 수호자로써 통치할 수 있으며, “정의(dike) 자체도 우리를 나무라지 않을 것”이다.(스테파누스 535a ~ 540b)
그렇다면 이러한 정체 속에서 자라나게 된 수호자들은 어떤 사람이며, 어떤 사람이 돼야 하는가. 이 ‘가장 큰 파도’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철학자(ho philosophos)들이 나라들에 있어 군왕으로서 다스리거나, 현재 이른바 군왕(basileus) 또는 최고 권력자(dynastes)로 불리는 이들이 ‘진실로 그리고 충분히 철학을 하게(지혜를 사랑하게)”(스테파누스 473d) 돼야 한다고 답한다. 그에게 있어 철학자란 진리(aletheia)를 구경하기 좋아하는 사람으로서(스테파누스 475e), ’관여하고 있는 것들‘을 알아볼 수 있는 ‘깬 상태(hypar)’로 살고 있으며(스테파누스 476d), 무지(agnoia)와 인식(episteme) 사이의 어떤 것(metaxy ti)으로써의 의견(doxa)이 아닌 인식할 수 있는 다른 힘을 가진 사람이다. 그렇기에 수호자들은 올바르고 아름다운 것들로 생각(판단) 되는 것들(ta dokounta)로써의 의견(doxa) 대신, ‘사실로 그런 것들(ta onta)’, 혹은 좋음(to agaton)을 추구하는, 그런 것들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 이들이어야 한다.(스테파누스 505d ~ 506b) 이들이 추구하는 좋음(to agathon)은, 태양의 비유 중 시각(opsis)에 있어 ‘생기게 한 자(demiorugos)’가 봄(horan)과 보임(horasthai)의 힘을 빛(phos)을 통해 생기게 함으로써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처럼(스테파누스 507b) 지성에 의해서 알 수 있는 영역과 지성(nous)과 지성에 알려지는 것들 – 형상들(eidos) - 을 가능하게 하는 힘(dynamis)인, 좋음의 이데아다.(스테파누스 508c ~ 508e)
이러한 정체는, “치자들이 겉으로만 지식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진실로 지식을 갖고 있는 정체”로써, “법률에 따라 다스리든 법률 없이 다스리든, 피치자들이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치자들이 가난하든 부자든” 관계없이 마치 의사의 처치가 우리 몸에 좋은 것만으로 판단하든 유일한 기준에 맞춰 유일하게 이름값을 하는(정치가, 스테파누스 293c,d) 정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 자신 또한 이 모든 논의에 대해 확신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가 보여준 것은 어디까지나 본(paradeigma)으로써의 국가다. 그 역시 “자넨 우리가 논의를 통해서 자세히 말한 그러한 것들이 완전히 실제로 실현되는 걸 보여 주어야만 된다고 내게 강요하질랑은 말게나. 오히려 자네로선 한 나라가 어떻게 하면 앞서 언급된 바에 가장 가깝게 다스려질 것인지를 우리가 발견할 수만 있다면, 이로써 자네가 보여 주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들이 생길 수 있는 것들로 우리가 확인한 것으로 하게나”(스테파누스 473a)라고 말하며 이 모든 것이 그에게 있어 일종의 ‘병 속의 뇌’와 같은 사고실험의 일종이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이 ‘실험’은 “진리도 모르면서 의견만 쫓아다니느라 전문기술이라고도 할 수 없는 가소로운 수사학을 제공하며”(파이드로스, 스테파누스 262c),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아다니느라, 어디에서도 자신들 자신의 거처에 정주하지 못하기 때문에” 제대로 ‘가늠하지도 못하는(astochon)’ 소피스테스(티마이오스, 스테파누스 19e ~ 20a)와는 결을 달리한다. 실제로 그가 8권에서 보여준 ‘욕망에 의해 휘둘리는’ 정체들(명예정, 과두정, 민주정, 참주정)의 전환을 설명하는 모습에서는, 그의 인식이 ‘마치 구름에 떠 있는 것 같은’ 시중의 인식과는 달리, 지극히 현실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소크라테스는 날카롭지만, 소피스트들과 달리 참혹한 현실에 흔들리지 않는다. 올바름이 밥 먹여주냐고 일괄하는 그들에게, 소크라테스는 당당하게 “그렇다”라고 답한다.
물론 그가 말하는 보상이, 모방술(mimetike)에 의해 고통 받는 세계에서의 것이 아닌 불사하는 것(athanaton pragma), 즉 혼의 올바름에 의한 것에 가깝기에, 국가에서의 삶에 있어 올바름(정의)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에 대한 소피스테스의 물음에 대한 답이 되기엔 어려워 보이는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소크라테스의 세계는, 한때 세상 만물 모든 것을 신의 이름을 붙여 불렀던 그리스인답게 신화와 인간의 경계선상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말하는 플라톤의 국가와 정의에 대한 항변은 그렇게 허망한 것만은 아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라는 ‘거울’을 스스로 만들어내 소피스테스를 비추어냄으로써 역설적으로 그들 논리의 맹점을 드러냄으로써, 새 지평을 열고자 했다.
물론 이 ‘거울’의 비춤과 비춰짐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현실은, 엄밀히 말해서 ‘보이는 것들’과 진실로 ‘있는 것들’ 사이 어딘가의 있는 또 하나의 의견(doxa)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시치미 떼기 술법(eironeia)’에 불과하다는 트라시마코스의 냉소 역시 근거 없는 비난이 아닐수도 있다. 그러나 플라톤이 만들었던 ‘거울’은 그가 그토록 비판했던 ‘모방’ 수준에 머무는 거울이 아니었다.
플라톤이 그려낸 본(paradeigma)으로써의 ‘국가’는 비단 현실에 국한되는 것이 아닌 불변하는 진리에 다가가려는 시도를 통해 밝게 빛난다. 그것이 진정한 이데아로써의 ‘태양’은 설혹 아닐지라도, 형상(eidos)에 보다 가깝게 가려는 시도를 통해 소피스테스의 그림자들을 드러낸다. 플라톤이 만든 ‘거울’은, 세계도 아니며 세계를 온전히 담아내지도 못하지만, 세계를 보다 왜곡없이 담아내려고 함으로써 그 세계에 보다 가깝게 다가간다. 온전하지는 않지만, 거울은 태양의 빛을 반사해 삶을 비춘다. 태양에 손을 더 높이 뻗어 가까이 다가갈수록, 소피스테스가 그려내고 있던 국가와 정의의 모습은 점점 빛을 잃게 된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올바름’은, 그렇기에 수많은 소피스테스를 넘어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항설에 따르면, 흡혈귀는 혼이 없기 때문에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도 비춰지지 않는다고 한다. 플라톤의 ‘거울’을 통해 스스로를 비춰봤을 소피스트는 그 거울에서 무엇을 봤을까. 적어도 플라톤이 그려냈던 소피스테스에 대한 모습을 우리가 믿는다면, 플라톤이 자신의 ‘거울’을 들고 ‘사냥’한 끝에 국가와 정의를 비췄을 그의 거울 속에서 그들이 찾을 수 있는 것은 어쩌면 희미하고 초라한 ‘모방’의 실루엣의 단말마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진짜’가 아니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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