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대화와 인간에 대한 탐구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은
현재까지 이름이 남는 위대한 고대 철학자로서, 당시 아테네의 아고라 광장에서 지적인 대화를 나누던 사람
중 하나였다. 근래 들어 철학책을 많이 읽겠다는 다짐을 하며, 소크라테스에
이어 그의 제자 플라톤의 이야기 또한 들어보고 싶어졌다.
많은 철학자들에게 인간은 특별한 존재였다. 다른 동물들은 하지 못하는 ‘이성적 사고’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플라톤 또한 인간을 직접적으로 정의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대화편에서 인간의 정의로 볼 수 있을 말들은 찾을 수 있다. 그는 인간을 ‘자기가 지각한 물체에 대하여 탐구할 수 있는 자’라 규정하며, 다르게 말하면 이성성을 다른 동물들과 인간의 차별성으로
꼽았다. 이는 분명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영향도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영혼과 불멸을 그의 철학의 뿌리로 삼았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스스로의 무지를 깨닫고 영혼을 돌볼 것을
주장한다. 이는 인간의 이성을 가장 위대하게 여겼던 소피스트에게도 해당된다. 그들은 교묘한 언변으로 사물의 본성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인간이 각자 선택하기 나름이라는 해체주의적 특성을 보였다. 플라톤은 이에 대하여 상당히 회의적이었고, 이는 그가 인간의 구제를 철학의 가장 깊은 의도로 두며 현실에 냉소를 띄고 이데아를 바라보게 만든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인간은 중간적 존재자 혹은 복합적 존재자였다. 인간은 신과 짐승의 사이의 어느 곳에 있었고, 영혼과 육체가 결합된
존재였기 때문인데, 플라톤은 『티마이오스』 편에서 우주론을 전개하며
그러한 인간의 태초부터 설명한다. 우주는 데뮤르고스라는 선한 신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그는 존재, 같음, 다름
각각의 불가분적 요소와 가분적 요소을 섞은 다음에 이를 나누어 세계영혼을 만들었다. 또한 불과 흙으로
완벽한 구 모양의 세계신체를 만들어 모든 것을 조화롭게 움직이도록 하고, 영혼의 본을 뜬 시간을 만든다. 그 다음으로, 천체에 강력한 이성을 주고 우주 곳곳에 배치하여 많은
신들을 탄생시킨다. 이러한 신들은 데뮤르고스의 명령을 받아 인간을 만드는데, 영혼은 데뮤르고스로부터 받지만 신체는 여타 신들이 만들었기에 완전하지는 않되 영혼만은 순수하다. 사실 플라톤은 이 이야기에 대하여 엄밀한 앎이 아니라 그럴 듯한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이는 당시 상황으로서 가장 첨단적이고 광범위한 지식을 총체적으로 아우른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플라톤의 철학이 더 잘 드러나는 부분은 인간의 구성에 대한 대목이다. 플라톤의
중요한 논점 중 하나인 삼분설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우선 존재의 기본원리부터 논하자면, 존재세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사물을 구별하도록 도와주는 원리인 페라스, 그를
연결하는 원리인 아페이론, 그리고 이 둘을 만나게 하는 능동적 힘인 포이운이 필요하다. 이는 『티마이오스』에서 각각 이데아, 코라, 데뮤르고스에 투영된다. 같은 방식으로 인간은 머리, 가슴, 배로 나눌 수 있다. 인간의
머리에는 가장 선한, 지혜가 깃든다. 반대로 머리와 가장
먼 배에는 욕망이 묶여 있다. 이는 육체적 필요를 욕망하는 영혼의 부분으로 일부러 사유하는 곳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것이다. 그 중간을 잇는 가슴에는 가사적인 영혼이 위치해 있다. 이는 용기와 기개의 원천, 즉 심장이 자리하는데, 이는 용기가 이성의 소리를 듣고 이에 저항하는 욕망을 힘으로 눌러 지배하기 위함이다.
플라톤은 이는 국가와 사회로 확장하여 목적론적 색채로 대응시킨다. 인간이 죽음을 맞아 환생을 하기 전, 각자의 처지에 따라 하늘의
이곳저곳에 머물게 된다. 정의로운 자는 하늘에 머물고, 부정한
자는 땅 밑에 머문 뒤, 어떤 형태의 삶으로 환생할 것인지 선택할 기회가 주어진다. 참된 철학자는 이 과정에서 올바른 선택을 돕는 지혜가 있기에 좋은 삶을 선택하게 된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플라톤은 지도자, 전사, 생산자 계급이 각각의 본분을 다할 때 질서가 지켜진다고 말한다. 지도자는 지혜를, 전사는 용기를,
생산자는 절제라는 덕목이 요구된다.
플라톤에게 결국 인간은 형상을 본받아 아페이론에 구현된 생명체였다. 중간적 존재자로서 인간은 가사적인 것과 불사적인 것을 동시에 소유하며 진정 본성을 실현할 때 질서가 회복된다고
생각했다. 플라톤의 철학은 내세에서의 구원에 초점이 맞춰진 듯 보인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시작은 현세에서 나의 행동거지이다. 유한한 존재자인 인간에게는 이를
염두에 두며 본분을 다할 것이 요구되었다.
비록 플라톤의 이데아에는 현대적 관점으로서는 젠더 바이러스뿐만 아니라
과학적으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지만, 삶에 있어서 본분에 맞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점은 시대를
지날수록 짙어 지는 부분이다. 당시 아고라의 고대 철학자들은 자연 과학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아직 플라톤의 대화편은 한 번 밖에 읽지 않아서 그런지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아직
남아있지만, 몇 천년 전에 이러한 사색이 가능했다는 것은 위대한 것 같다고 느꼈다. 또한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하여 고민해 보며 성찰해보는 기회를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