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상실의 시대’로 무라카미 하루키를 처음 접한 뒤 흥미를 느껴 읽게 된 하루키의 두 번째 작품이다.(상,하 권 모두 읽었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읽게 되었는데 모든 책이 그러하겠지만 책 겉표지에 지나치게 많은 호평(서평)이 적혀 있어서 더 기대감을 가지고 읽게 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필자의 이해력이 부족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필자에게 있어서 이 소설은 그렇게 잘 쓰인 소설은 아닌 것 같다. 전체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책에는 아이와 어른의 경계선에 있다고 볼 수 있는 15살의 다무라 카프카라는 주인공과 또 다른 주인공으로 전쟁의 여파로 머리가 나빠진(텅 비어버린), 그렇지만 고양이와 얘기할 수 있는 노인 나카타가 나온다. 책에는 이들의 이야기가 각각 병렬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홀수 장은 다무라의 이야기, 짝수 장은 나카타의 이야기) 의식과 무의식을 통해 이 내용들이 묘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둘이 만나는 장면은 나오지 않지만 결국 같은 장소에서 이야기가 함께 진행된다. 책을 읽는 내내 지울 수 없었던 생각은 장면이 머릿속으로 그려질 정도로 묘사가 뛰어나고 멋진 표현들이 많아 문장력이 뛰어나다고는 생각했지만, 그 내용들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그리고 소위 말해 작가가 초반부터 던져온 ‘떡밥’들이 거의 풀리지 않은 채 이야기가 끝났다고 생각한다. 일례로 사에키 상은 다무라의 어머니인건지 사쿠라 상 역시 다무라의 누나인 것인지 끝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고 다무라의 아버지(조니 워커)의 죽음이나 연관성 역시 그냥 무의식 속에서 이루어진 행위처럼 표현되었다. 또한 인물들이 하나같이 철학적이고 지적이라는 것도 조금은 불편했다. 이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현학적이고 작가가 자신의 지식을 뽐내기 위해 쓴 것”이라고 비평한 리뷰도 있었다.
그리고 인문학적 지식이 부족한 필자지만 이 책이 그리스 로마신화라는 큰 틀에서 쓰였다는 것은 눈치챌 수 있었다. 오이디푸스 신화는 두 말 할 것 없이 이 책의 큰 원형을 차지하고 있고, 글 후반부에는 오르페우스 신화(뒤를 돌아보면 안된다)도 잠깐 나왔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 중 인상 깊었던 부분을 꼽자면 오시마 상과 다무라가 마지막 작별인사를 나누는 장면이다.
“‘세계는 메타포야, 다무라 카프카 군’하고 오시마 상은 내 귓가에 대고 말한다. ‘하지만 나에게나 너에게나, 이 도서관만은 아무런 메타포도 아니야. 이 도서관은 어디까지나 이 도서관이지. 나와 너 사이에서 그것만은 분명히 해두고 싶어.’”
이 부분을 통해 필자는 이 책 자체가 세계의 모든 사물들은 메타포 속에 있으나(오이디푸스 신화처럼) 개인 간의 기억이나 사랑과 같은 것들은 메타포가 아니라 그들만이 혹은 그 자신만이 소유할 수 있는 변치 않는 고유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다 읽고 혹시 필자가 명작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것인가 염려되어 책에 관한 해석들을 더 찾아보았는데 그 중 상당히 납득할만한 글이 있었다. 즉, 리얼리즘과 사회적인 면을 주로 다루는 영미소설과 달리 일본 고유의 문화와 정신 때문에 주로 내면소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가 더글라스 케네디의 ‘빅픽처’를 훨씬 재밌게 읽고 이 소설에는 혹평을 했는지도 모른다. 필자는 전체적인 줄거리의 짜임새나 스토리에 주목하였는데 이 리뷰에서는 이 책이 일본소설인 만큼 “주인공에게 일어난 기이한 사건들과 미스테리들에 빠져 고민하지 마시고, 주인공 다무라 카프카의 내면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에 집중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라고 하였다. 그 외에 다른 리뷰들에서도 ‘삶을 살아가는 이유’ 혹은 ‘다무라의 내면의 성장’등에 집중하라고 하고 있기는 한데, 필자가 만약 그런 부분에 주목해서 읽었다면 또 어떤 평가를 했을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