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데우스 /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 김영사
12,000년 전 인류가 돌입한 농업혁명을 통해 현재 우리가 먹는 식량의 95%를 생산하고 길들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지금 식탁 앞에 앉아서 먹는 것들이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이 덕분에 호모 사피엔스는 수렵채집을 그만두고 풍부한 식량을 얻을 수 있었지만, 이로 인해 행복해 진 것은 아니다. 호모 사피엔스는 수렵시절 보다 더 열심히 일했지만 잉여 생산물은 권력자의 손에 넘어 갔고 그들의 권력으로 이용되었다. 유발 하라리는 우리가 작물을 길들인 것이 아니라 작물이 인간을 길들였다는 시각을 가지고 있다. 작물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키우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우리의 소유물로 인식하고 있는 수 많은 첨단 과학기술이 우리를 지배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장할 수 있을까?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 대결 이후 우리나라에는 AI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맴돌았다. AI를 어떻게 개발할 것인지,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에 관한 토론보다는, 발전된 AI가 인류를 지배할 것이란 걱정만 하고 있다. 행동하지 않고 두려워만 하면서 무엇인가 해결될 것을 바라고 있는 실정이다.
유발 하라리는 그의 저서 <사피엔스>를 통해 현재까지 인류가 걸어온 길을 소개하였다. 역사를 통해 앞으로의 인류를 예측하면서, 현재 우리가 엄청난 혜택을 누릴 천국과 절망으로 가득한 지옥의 갈림길에서 선택을 고민하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그는 후속 저서 <호모 데우스>를 통해 이 선택 이후 인류의 미래를 예측한다. ‘데우스’. 라틴어로 ‘신’을 의미하는 이 단어를 통해 우리가 호모 사피엔스를 넘어 신의 자리를 차지할 호모 데우스가 될 것인지를 서술하였다. 이미 인공지능은 인간의 인지능력을 따라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은 그것을 반증한다. 많은 학자들이 가까운 미래에 지금과는 차원이 다른 현실에 펼쳐질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컴퓨터와 디지털, AI는 인간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할 가능성이 크다. 반면, 생명공학은 인간의 수명을 연장하고 20대의 건강을 유지시켜 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수 많은 사람들이 존재할 것이고 그로 인해 엄청난 갈등이 야기될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불멸을 추구하며 호모 데우스가 되는 과정에서 수 많은 호모 사피엔스가 희생될 것이다. 인공지능보다 업무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 기계보다 생산성이 떨어지는 사람, 불멸의 건강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은 쓸모없는 생물로 타락할 것이다.
인간은 어떻게 쓸모 없는 존재가 될 것인가. 인간, 즉 유기체가 갖는 한계는 인공지능이나 무기체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무기체와 달리 유기체는 생존에 많은 한계가 따른다. 그러나 인공지능이나 무기체는 지구 밖 어디에서도 생존할 수 있다. 우리가 직면한 문제가 바로 이 차이에서 비롯된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일은 지능과 의식의 분리이다. 인간과 같은 지구 상의 존재들은 의식과 지능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러나, 바둑 천재 이세돌을 제친 알파고는 뛰어난 지능을 가지고 있지만 의식과 감정이 없다. 수 십 년 동안 컴퓨터의 지능이 매우 발전했지만 의식은 발전하지 않았다. 그런데 컴퓨터는 의식까지 가지려 하고 있다. 물론 의식을 가지지 않은 현재의 인공지능, 컴퓨터만으로도 인류에 큰 두려움이 되고 있다.
뛰어난 인공지능은 어떻게 인간을 쫓아낼 것인가. 윗 문단의 시작에서 던졌던 질문을 살짝 바꿔볼 필요가 있다. 인간이 어떻게 쓸모 없는 존재가 ‘될’ 것인가가 아니라, 인공지능이 어떤 방식으로 인간을 쓸모 없는 존재로 ‘만들’ 것인가. 잘 알려졌다시피, 인공지능과 디지털 기술은 감정이나 느낌이 필요 없는 직종을 먼저 대체할 수 있는 것이다. 택시나 버스운전사의 역할은 인공지능이 더 경제적이고 효율적이고 효과적이다. 10년 전 많은 전문가들은 인공지능을 통한 자율주행은 실험실 내부에서나 가능하고, 수 많은 차와 사람이 있는 실제 도로에서는 불가능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구글과 테슬라가 개발한 자율주행차는 머지 않은 미래에 도로를 활보할 것으로 기대된다. 도로 위에 자율주행차들은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서로가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 공유하고 예상할 것이다. 이로 인해 교통사고가 크게 줄어들 것이다. 이는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매우 경제적 이익이지만 동시에 운전기사, 운전교육자, 교통경찰 등 수 백만명이 직업을 잃을 것이다. 기술의 발전이 가진 양면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의사도 대표적인 그 예가 될 수 있다. 지금 우리는 환자가 의사를 만나서 증상을 얘기하고, 몇 가지 질문을 주고 받은 뒤 진단을 한다. 의사와 환자가 만나는 짧은 시간에 제한된 정보로 건강에 대한 진단을 내린다. 이는 의사의 오진을 야기한다. 또한, 감정을 가진 의사가 내리는 진단 자체가 오류를 품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다르다. IBM이 개발한 인공지능 의사 ‘왓슨’은 결국 의사를 대체할 것이다. 컴퓨터 ‘왓슨’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질병을 다 알고 있다. 즉각 모든 정보에 접근할 수 있고, 매초 매분 업데이트할 수 있다. 그리고 언제나 인간의 곁에서 의사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조기에 암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기술을 무한히 복제할 수 있다.
미래에 인공지능은 인간의 성격이나 감정상태 또한 진단할 수 있을 것이다. 말투와 어조, 단어를 토대로 지금 어떤 기분인지, 어떤 심리상태에 놓여있는지 분석할 수 있다. 통계학을 기반으로 한 데이터 분석이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는 지금까지의 진보와는 차원이 다른, 굉장히 대단한 발전이지만 일자리 측면에서 그리고 인간의 역할이란 측면에서 큰 위협이 될 것이다. 인공지능은 현장노동자, 운전자, 경찰관, 의사, 기자라는 직업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이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새로운 일자리가 생길 것을 기대하고 있어야 할까. 과거 산업혁명 당시 기계로 인해 일자리를 잃은 수 많은 사람들이 서비스 분야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찾았다. 인간이 가진 신체적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벗어나 인간의 인지능력이 요구되는 일자리로 향했다. 하지만 이번의 과학, 디지털 혁명에서 이러한 현상이 다시 발생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 분명히 새로운 일자리가 생기긴 하겠지만, 분명 이전과는 다른 형태일 것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 능력이 있다. 신체적 능력과 인지능력이 그것이다. 산업혁명에서는 기계가 인간의 신체적 능력을 대체했다. 그런데 이제 인공지능이 인간의 인지능력을 대체하려고 한다. 더 이상 인간의 능력을 발휘할 분야가 없는 것이다. 인간의 마지막 희망이라고 불리는 감성지능도 인공지능이 대체할 것이다. 결국 대부분의 인간이 위협 받을 위기에 처해있다.
19세기에 산업혁명과 함께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생겨났다. 인류는 이 계급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많은 고민을 했다. 하지만 농업시대에서 발생한 새로운 형태의 고민은 적절한 해답을 내놓지 못했다. 인간은 더 이상 성경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성경이나 코란 등에는 기계로 인해 소외된 인간에 대한 고민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민주주의와 같은 새로운 이념과 모델이 출현했다. 그리고 지금, 그때와 같이 새로운 계급층이 생성될 것이다. 그것은 바로 무노동자 계급이다. 직업도 없고, 경제적 효용도 없는 계급을 말한다. 우리가 산업혁명 시대로부터 물려받은 공산주의, 민주주의와 같은 모델은 이러한 계층이 처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이런 문제의식을 담은 사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공지능과 첨단 생명공학으로 인한 부작용을 고민한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우리는 그래서 새로운 사회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모델을 생각해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질문이며, 해결방안이다. 인간이 인간을 배제하는 현실, 인간이 인간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시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유발 하라리는 인류가 행복해지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약 500여 년 전 일어난 과학혁명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었을까. 부의 축적과 진보, 생활의 편리함이 그 기준이라면 이뤄냈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엄청난 경제 성장을 통해 부를 축적한 인류는 더 이상 굶주리지 않는다. 과거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볼법한 풍경을 현실에서 재현하고 있다. 하지만 과학혁명은 대부분 자본주의의 확장과 함께 환경파괴를 야기했다. 그리고 이러한 추세는 250년 전의 산업혁명과 50년 전의 정보혁명을 통해 심화됐다. 그리고 현재 생명공학 혁명이 진행되고 있다. 중요한 문제는 인류가 이렇게 많은 혁명과 진보를 겪으면서도 행복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인류는 수 세기 안에 신인류, 사이보그를 통해 영생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행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유발 하라리는 우리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한다. 앞으로 엄청난 권력과 힘을 얻게될 것인데, 이를 행복으로 전환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인류를 지배한 이데올로기와 정치체제는 이 방법을 모르는 것 같다. 이 안타까운 현상의 원인은, 수 많은 이데올로기와 정치체제가 인류의 행복이라고 주장하는 가치들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다.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 자본주의자들이 정의하는 행복은 공존할 수 없을 만큼 적대적이다. 이 적대는 인류가 스스로를 파괴하는 참혹한 전쟁을 치르게 했을 만큼 강력하기도 하다. 또한, 각 이데올로기와 정치체제가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믿는 것들이 사실은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도 큰 문제이다. 이미 수 많은 학자의 주장과 연구를 통해 이런 것들이 증명되고 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규모와 기술력을 가진 대한민국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부탄이나 태국의 그 것보다 한참 낮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성장이 왜 인류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했는지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역사학자’는 매우 드물다. 정치학자, 행정학자, 경제학자들과 함께 역사학자들도 이러한 문제에 근본적인 의문을 가져야 한다. 물론 다른 분야의 학자들이라고 해서 이 문제를 깊이 있고 장기적으로 고찰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학자는 과거를 통해 미래를 진단할 수 있는 미래학자의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역할을 유발 하라리가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유발 하라리가 말하는 행복이 무엇일까. 우리는 그 동안 건강과 부, 권력과 같은 물질적이고 상징적인 것이 곧 행복이라고 인식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그 동안 수 많은 심리학자, 철학자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행복이란 매우 주관적이고 즉각적인 그리고 장기적인 감정이다. 내 속에서 느끼는 감정이기 때문에 외부에서 측정하기가 매우 까다롭다. 그럼에도 그들은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물질적 요소 뿐만 아니라 사회적, 윤리적, 정신적 요인들이 행복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 많은 연구와 조사의 결과는, 돈이 실제로 행복을 가져다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정도 까지만이며, 일정 정도를 넘어서면 부가 가져다주는 행복은 거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부의 한계행복이 체감한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는 바로 ‘기대’였다. 행복은 주관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즉,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 판단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이 객관적인 조건에 맞추어 본인이 행복한지를 판단한다면 모든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기대하는 행복의 기준이 있고, 그것을 다른 사람을 통해 형성한다. 그리고 이 기대는 지금껏 우리가 누린 혁명을 통해 기준이 높아졌다. 통신기술과 디지털의 발달로 아프리카의 사람들은 미국 뉴요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반세기 전보다 부유해진 그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미국사람들을 보고 기대감을 높인다. 그리고 더 나은 행복, 즉 기대를 채우기 위해 무자비한 독재자를 몰아낸다. 북한 사람들은 드라마나 예능프로그램을 통해 한국 사람들과 비교하며 그들의 기대를 높인다. 그리고 목숨을 건 탈북을 감행한다.
그럼 이제 우리가 직면한 엄청난 생명공학 기술을 바탕으로 영원한 생명과 건강을 얻는다는 것을 가정해보자. 이는 언뜻 모든 인류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줄 것 같지만 유발 하라리가 말한 행복, 기대에서 비롯되는 주관적인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지금보다 더 줄어들 것이다. 이 엄청난 기술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대다수의 돈이 없는 사람은 불로장생을 영위하는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엄청난 절망에 빠질 것이다. 그리고 그 것은 곧 불안과 절망을 넘어 분노로 표출될 것이라고 유발 하라리는 말한다.
그러나 유발 하라리는 논지를 전개하면서 정말 행복이 주관적인 느낌이며, 행복이 특정한 감정 상태인지를 묻는다. 많은 전통철학과 불교는 이와 다른 입장을 취한다. 행복은 자신의 진실한 모습,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하는데서 온다는 것이다. 오히려 행복을 위해 특정한 감정을 추구하는 행위에서 고통이 유발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행복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가설을 만들어내고 행복을 규명하기 위한 연구방법을 찾고 있는 단계이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역사서는 위대한 인물의 사상을 담는데 초점을 맞췄다. 인류의 행복에 관해 고찰하는 부분은 많이 비어있는 상태이다. 우리는 앞으로 새로운 인류를 고안하면서 이 부분을 채워나가야 할 것이다.
유발 하라리는 지금껏 어떠한 학자도 내놓지 않은 고민을 인류에 내놓았다. 과학기술과 디지털기술, 생명공학이 주는 새롭고 신기한 과실에 빠져 그것이 진리이자 인류의 미래라고 믿고 있던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이 울림은 그가 역사학자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불과 수십 년 전의 과거를 고찰한 것이 아니라 인류의 시작점부터 2017년을 거시적으로 바라보았다. 이를 통해 천 년의 미래를 내다 본 그의 통찰력은 전 세계의 수 많은 정치학자, 경제학자, 행정가와 과학자들에게 본인들의 역할과 행동에 대해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지금껏 학자들이 하지 않았던 그의 고민. 과거에 생명체가 행복해지기 위해 행했던 행동들을 분석하고 우리 인간이 행복해지는 길을 고민하고 어떤 길을 걸어 나가야 하는지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신의 영역을 향해 쉼없이 달려온 인류에게 쉼표를 찍어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변방의 소수 종족 호모 사피엔스가 다른 종을 몰아내고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던 첫 번째 수단은 바로 언어였다. 현재 그 언어와 같은 강력한 수단을 인류는 개발하고 있다. 엄청난 과학 및 디지털 기술은 인류를 발전시키다 못해 파괴적인 수준까지 끌어올리고 있다. 굶어죽는 사람 보다 비만으로 죽는 사람이 더 많고, 질병으로 죽는 사람보다 나이가 들어서 죽는 사람이 더 많다. 범죄나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보다 자살하는 사람이 더 많다. 과거 인류의 가장 큰 과제였던 가난, 질병, 전쟁은 더 이상 우리의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새로운 문제들이 도처에서 발생하고 있다. 과거 인류의 문제는 1차원적으로 그것을 해결하기만 하면 됐다. 그러나 지금 인류에게 들이닥친 문제들은 그렇게 간단한 것들이 아니다. 이제 인류는 그 문제를 풀기 위해 속도보다는 방향에 집중해야 할 것 같다.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역사를 공부해야 한다는 격언은 어느 시대에나 통하는 말이다. 우리나라는 식민지와 전쟁을 겪은 폐허 속에서 유례없는 속도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 이는 뛰어난 기술력과 인적역량 덕분에 가능했고, 오늘날에는 IT기술과 바이오 분야를 선도하는 중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수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국민들은 부유해졌지만 행복을 잃었다. OECD 가입국 중 최고의 자살률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가 뛰어난 기술과 경제적 부를 가지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음에도 그렇게 사용하지 못하는 것 같다. 우리는 이제 첨단 생명공학, AI, 디지털 기술을 가지고 새로운 시대를 창조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면 과거 그랬던 것처럼 국민들을 불행하게 만들 것이다. 우리는 그 선택에 기로에 놓여있다.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엄청난 혜택을 누릴 수도 있고, 절망의 시대로 이끌 수도 있다.
현재 인류가 직면한 문제를 우리에게 대입하면 그것은 한반도의 문제로 떠오른다. 한국전쟁 직후, 한국과 북한은 정치경제사상을 제외한 모든 것이 동일했다. 오히려 북한이 더 잘 살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2017년, 38선을 기준으로 북쪽의 땅은 흡사 저주내린 땅과 같다.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는 경우가 다반사고, 전기가 부족해 밤이면 깜깜한 어둠 속에서 생활한다. 3대를 계승하고 있는 독재자는 핵무기 내세우고 인민들을 인질로 내세워 전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는데 열중이다. 반면,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경제대국으로서 첨단 과학기술과 정보통신 기술, 민주적인 정치제도를 향유하고 있다. 앞으로 우리가 예상하는 과학혁명이 한반도를 불어 닥친다면 이 격차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벌어질 것이다. 이미 많은 정치가들과 역사학자들은 두 나라의 통일에 대해 부정적인 전망이다. 경제격차가 한반도보다 적고, 교류가 많았던 동독과 서독의 통일과정에서도 큰 어려움을 겪었는데, 엄청난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격차를 가진 한반도가 통일을 하려면 수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과학기술의 혁명은 이 어려움을 더욱 심화시킬 것이다. 우리가 만약 진심으로 통일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이러한 격차와 부작용도 함께 고려해봐야 할 시점이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정치가들과 학자들이 먼저 떠안아야 되는 숙제일 것이다. 그리고 그 방향의 선택은 우리 모두가 내려야 할 큰 문제이다.
대한민국은 폐허가 된 땅에서 엄청난 발전을 이뤄냈다. 그 과정 속에서 수 많은 경제적 부작용을 낳았고, 많은 사람을 희생시켰으며, 정치적으로 후퇴하기도 했다. 그것들은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채 많은 사람들과 많은 시간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방향을 바꾸고, 아픔을 치유하고,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과학기술과 정보통신기술은 예외이다. 한 순간도 우리의 발자취를 돌아보지 않았다. 앞으로 우리가 어떤 미래를 그려나갈지를 예측하지 않았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언제나 인류를 행복하게 만든다, 과학기술은 무조건 우리를 부유하게 만들고 국가를 융성하게 하며, 경쟁력을 키우는 수단이다. 이러한 믿음은 곧 진리가 되었고 어떠한 경우에도 기술의 발전을 가로막을 수 없었다.
유발 하라리의 저서와 그의 이론은 우리나라에도 큰 열풍을 불러 일으켰다. 이 열풍이 그저 열풍에만 그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과학자와 행정가, 정책입안자들과 정치인들은 유발 하라리의 경고를 깊기 새겨들어야 한다. 결국,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정하는 것은 정치이고 법이고 제도이기 때문이다. 국민들의 여론이 법과 제도를 만들 수도 있고 반대로 법과 제도가 먼저 마련될 수도 있다. 과학기술에 한정해서는 법과 제도가 먼저 마련되어야 할 것 같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과학기술과 진보에 취해 그로 인한 부작용을 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있다. 이 때, 정책입안자들이 나서서 근시안적인 시야를 넓혀줄 필요가 있다. 수 많은 사람이 믿고 있는 진리가 전반적으로 바뀌도록 기대하는 것은 너무나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 땐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 이번만큼은 정책이 그 노력을 하는 것이 어떨까.
앞서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를 점령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보이지 않는 존재를 믿는 능력, 그로 인한 협력과 공존이라고 했다. 그런데 과학기술이 엄청난 진보를 이룰 미래도 그 힘이 계속 유지될 수 있을까? 이미 많은 인류는 종교와 영적인 힘에서 벗어나 객관적이고 공정한, 과학이라는 진리를 믿고 있다. 과학혁명은 이러한 현상을 더욱 심화시킬 것이다. 그러나 유발 하라리는 종교와 이념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오히려 과학기술에 의미를 부여하는 상상적 허구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는 생물학과 역사학을 융합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역사학자이다. 앞으로 미래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는 모르지만, 그는 그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 과학기술이 아니라 바로 우리, 인류라고 말한다.
인류가 발전을 꾀하면서 행복하기 위해서는 인류의 ‘Vision’ 안에 우리가 추구하는 지향점을 녹여내야 한다. 그 비전은 정책이나 법을 통해서도 투영될 수 있을 것이다. 미래를 상상하는 비전을 가진 집단은 끊임없이 새로운 허구를 만들어내고 변화할 것이다. 지금까지 인류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반면 인류가 상상적 허구를 중시하지 않고 현재에 머물러 있는다면, 그리고 현재의 비전을 그대로 유지한다면 변화하는 세계의 패러다임 속에서 도태되고 종국적으로 멸망할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에 의해 멸종된 다른 인간 종의 사례가 그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현 시점에서 요구되는 상상적 허구를 바탕으로 인류 전체가 지향해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스스로 무엇이 되길 원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상상적 허구를 반영한 비전을 가지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고 있는 집단은, 미래를 현실적으로 바라보고 그로 나아가기 위한 방법을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비전과 방향은 그 다음의 혁명으로 도약하기 위한 상상적 허구가 창조될 수 있는 탄탄한 기반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선순환을 통해 호모 사피엔스는 권력적 지위를 추구하면서도 행복의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인류에게 ‘Imagined reality’. 상상적 허구가 요구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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