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읽고 배우는가?”에 대답하다, 『화씨 451』
레이 브레드버리는 이전에는 문학계의 아류라고 여겨지던 SF를 미국에서 하나의 장르로서 자리 잡게 한 데 크게 기여한 작가로서, 『화씨 451』은 그 중에서도 SF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화씨 451』에서 가장 통제하는 것은 언론이나 시위, 집회가 아니라 다름 아닌 ‘책’이다.
읽고 배운다는 것: 몬태그와 파버에 대하여
도시에 책이 발견되면 책을 물론 그 책이 있던 집까지 태우는 방화수(fireman) 몬태그는 자신이 하는 일에 조금의 의문도 가지지 않은 채 매일을 살아왔다. 그렇게 아무런 특별한 것 없이 잔잔한 호수와 같은 그의 삶에 처음으로 돌을 던진 것은 공원에서 만나게 된 이상한 노인, 파버였다. 파버는 시를 읊으며 사물이 아닌 사물의 ‘의미’를 이야기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느낀다고 이야기한다. 책이란 무엇일까? 문장으로 이루어진 것을 우리는 글이라고 하지만, 세탁기 사용 설명서나 전화번호부를 두고 읽을 만한 ‘책’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단순한 설명이 아니라 글자에 의미를 부여하고 사람이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그런 것을 두고 우리는 책이라고 말한다. 무지를 감춘다면 다른 이들의 비웃음을 면할 수 있지만 대신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배운다는 것은 이렇게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놀림을 받는 것도 괴롭지만, 스스로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훨씬 더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몬태그의 이름은 제지 회사에서, 그런 몬태그가 체제에 의심을 품고 도시를 탈출하도록 돕는 파버는 필기구 회사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1). 흔히 펜은 문학적 의미를 가진 소재로 활용되고는 한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든지 ‘펜으로는 사람을 살릴 수도, 죽일수도 있다.’와 같은 말은 글이 사람을 얼마나 움직이고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한편 종이는 이런 펜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수단이다. 펜이 쓰일 수 있도록 해주는 종이는 한 도시에 변화를 가져오는 전도사가 될 주인공 몬태그와 결부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레이 브래드버리의 디스토피아와 소신에 대하여
그런데 작가의 후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렇게 현대 사회를 닮은 디스토피아를 묘사한 이 소설의 초고는 더없이 급박하게 쓰였다. 레이 브래드버리는 타자기에 동전을 넣으면 주어지는 30분의 제한 시간 동안 글을 마치기 위해서 말 그대로 ‘시간은 돈이다’라는 격언을 실감하며 타자기를 두드려야 했다2). 어떻게 보면 뭐든지 돈으로 환산해버리는 현대 사회와 그렇게 시간에 쫓기고 매이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단면이 나타나는 일화인데, 본인이 이렇게 비판하는 현대 사회에 가장 맞는 방식으로 그 현대 사회를 은근하게 비판하는 SF 디스토피아 소설이 탄생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화씨 451에 나오는 방화수나 책을 광적일 정도로 배척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아무리 디스토피아를 조성하기 위한 설정이라지만 너무 과도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작가 본인이 마치는 글에서 밝혔듯이 여태 받아온 딴지를 거는 편지들, 작가가 전달하려 했던 느낌과는 상관 없이 편집 과정에서 은유와 구절들이 수정되고 삭제되었다는 현실을 보면 우리가 잘 느끼지 못했을 뿐이지, 책은 이미 다른 방식으로 태워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레이 브레드버리는 이런 검열적인 현실을 아주 신랄하게 비판한다. 자신의 소설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고치려고 하지 말고 그 자체로 받아들이라고 소리친다. 책이라는 경기에서는 작가가 심판이자 선수라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이런 방향의 극단적인 대처는, 독자와 작가의 상호 소통을 통해 완성되는 책의 가치와는 상반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래드버리의 이러한 작가로서의 소신이 있었기에 디스토피아에 저항하는 몬태그와 같이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캐릭터가 탄생할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1) 레이 브래드버리, 박상준, 『화씨 451』, 서울: 황금가지, 2009, 257쪽.
2) 위의 책, 25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