끔찍한 전공 공부 속에서 틈날 때 단편 소설을 읽는 것은 멋진 일이다. 모든 공식과 법칙과 규칙들은 사라지고 온전히 나와 단편의 텍스트만 남아 기분 좋은'흰' 침묵 속으로 함축한다. e-book의 흰 표지를 보고 이끌린 듯이 읽게 된 흰.
짧은 문단의 연속이었지만 다 읽고 난 후에 괜스레 명치가 먹먹해지는 글이었다. 흰 보자기에 싸여 희게 흩어진 그녀는 텍스트 안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슬픈 인물이었다. 그와 그녀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그 순간이 애매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슬프고 아름다운 흰 눈 같은 이야기 속에 흰 이야기들은 어쩐지 위로를 건네는 듯했다, 그녀가 좋아하던 하얗게 햇빛에 소독한 흰 베갯잇과 이불처럼.
눈이 별로 내리지 않는 곳에서 태어나고 자라 제대로 내리는 눈을 본 적이 없었다. 영화로든 책으로든 희고 아름다운 것이라며 모두가 찬양하던 그 눈. 막상 눈이 내리니 그다지 기쁘지 않았다. 이리 저리 바람이 불어 우산으로 막지 못했고 새로 개시한 코트에 눈 결정이 묻어 털어내기 바빴다. 춥기만 했었고 눈이 그친 후에 타이어가 지나간 자리는 더럽고 질척이는 무언가만 남아있었다. 산타할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을 처음 안 7살배기 꼬마처럼 실망했다.
그러다 다시 눈을 봤다. 도서관의 전망이 탁 트인, 제일 좋아하는 자리에서 제일 좋아하는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었다. 마치 누가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라고 한 것처럼. 창밖을 보라 창밖을 보라 흰 눈이 내린다. 정말 희고도 흰 눈이 내렸다. 함박눈이 온 세상을 뒤덮고 시야를 하얗게 만들고 있었다. 그제야 다시 흰 것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었다. 카메라로 담아 보려 했지만. 어찌해도 흩어져 사라져 버리는 결정들의 행진을 담을 수 없었다. 마치 그녀가 생을 일찍 마감해 버렸기에 태어난 그처럼, 한번 망가졌기에 다시 생긴 그 붉은 벽돌의 건물처럼, 흰 것의 아름다움은 내 안에서 한번 꺼진 후 그런 적 없다는 듯 다시 피어올랐다.
이제 나에게 흰 것들을 물끄러미 상상해 본다. 제사가 끝나고 엄마가 부스럼을 막고 액을 막는다며 제사에 올렸던 흰 사발에 물과 밥을 탄 것. 군대에 간 남자친구가 휴가 첫날 뜬금없이 선물한 흰 안개꽃. 처음 산 스마트폰의 흰 유리 뒷면. 전 남자친구에게 힘겹게 이별을 고할 때 물끄러미 바라보던 흰 머그잔, 차갑게 식어가던 유자차. 도서관에서 밤을 새고 한 숨 돌리며 니코틴을 보충할 때 하얗게 흩어지던 담배 연기. 흰 것들은 모두 우리의 일상 속에서 우리를 위로하고 감동을 주며 실망시키다 환희를 가져다준다.
"삶은 누구에게도 특별히 호의적이지 않다, 그 사실을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이마를, 눈썹을, 뺨을 물큰하게 적시는 진눈깨비. 모든 것은 지나간다. 그 사실을 기억하며 걸을 때, 안간 힘을 다해 움켜쥐어온 모든 게 기어이 사라지리란 걸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