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이라는 책을 처음 읽었을 때의 묵직한 감정이 아직도 떠오른다. 보통 소설책을 굉장히 빨리 읽고, 다음 책을 읽기 시작하는 간극도 짧은 편인데 이 책을 읽을 때에는, 읽는 속도만 무진장 빨랐지, 다음 책으로 넘어가는 과정이 도통 평소의 나같지가 않았다. 소설 자체가 가지고 있는 몰입감이 어마어마 했다.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한국에 다시 돌아올 때에는 이미 완독을 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여행 중에 특별히 책을 읽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김지영의 인생에 대한 공감이 주는 우울감은 솔직히 버티기 힘들었다.
나는 소위 말하는 ‘쎈 여자’라는 카테고리에 속하는 편이다. 지금껏 그래왔고, 아마 현재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는 시선도 다르지 않을 것으로 예상한다. 그 기저에는 나의 부모님의 교육관과 그로인해 형성된 가치관이 짙게 깔려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는 ‘여자라고 못할 게 뭐야? 하고 싶은 것 다해!’ 라는 신념을 가지고 나를 기르셨고, 아버지는 장녀인 나에게 한 번도 내가 여자 아이임을 실망하는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다. 어머니는 결혼, 출산 후에도 경력을 이어와 나름의 직급을 가지고 계신다. 가끔은 아버지보다 많은 돈이 손에 떨어질 때도 있다. 그런 환경이 나에게 가져다 준 것은 당당함과 큰 목소리, 뭐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 하지만 동시에 세상에 성차별은 없다는 아주 무책임한 가치관 역시 심어주었다.
내가 겪지 않았다고 해서, 내 눈 앞에서 펼쳐지지 않았다고 해서, 존재하는 것을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자칫 자신이 당한 차별을 설파하는 사람 앞에서, ‘근데, 나는 안그렇던데?’라는 말을 내뱉는 눈치 없는 사람이 될 뻔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대학에 들어와서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는 친구들을 두루 만났고, 책을 읽고, 더 많이 공부하고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여기까지 성장 배경을 얘기한 이유는, ‘82년생 김지영’에서 가장 공감했던 부분이 김지영의 성장 배경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어머니가 가지고 계시던 여자도 배워야한다는, 여자라고 못할 게 뭐가 있냐는 가치관. 그녀도 나도 그런 사람의 밑에서 나고 자랐는데. 그런데. 대학에 오고, 취직을 해보니 차별이라는 것은 내가 당당하다고 존재하지 않는게, 혹은 사라지는 게 아니구나. 다른 어떤 내용 보다도 그런 맥락들이 마음에 깊게 박혔다.
이 책을 완독한 지인이 ‘그래서? 왜 김지영은 그렇게 밖에 못한거야?’ 라는 질문을 했다. 이 책을 그저 한 여성의 찡찡거림, 남탓하기 쯤으로 여기는 사람들을 정말 수도 없이 보았기 때문에 상대하기 싫었다. 하지만, 맞다. 그 지점이 이 책의 한계이다. 김지영이라는 사람은 그냥 그대로, 쭉 살아간다. 더 나은 무언가를 쟁취하지 못한 것, 좀 더 주체적이지 못한 것. 페미니즘 소설로서 이 책이 갖는 약점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난 그런 이유로 그 여자를 비난하고 싶지 않다. 시스템을 비판하라면서 시스템 밖으로 그 사람을 추방하고 싶지 않다. 여성이 아이를 낳기를 종용하면서, 출산 후 여성과 아동이 받는 투명한 혐오 사례가 하루에도 수도 없이 읽힌다. 분명 나는 남자 직원보다 무거운 짐을 더 빠르고 안전하게 옮길 수 있는데 나에게는 일감을 주지 않았다. (알바하면서 겪은 경험담임.) 시스템의 결함을 설파하기 위한 책을 두고서, 왜 부당함에 맞서지 않았냐고 개인을 탓하지 말라. 우습게도 한 명의 사람은 아무런 힘이 없다.
얼마 전 이 책이 번역되어 일본에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출간된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증쇄가 결정되었고, 아마존에서 베스트 셀러로 이름을 올렸다고 한다. 불꽃은 전쟁터에서 더 크게 터지기 마련이다. 일본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서 왜 이 책이 그 나라에서도 그렇게 반향을 일으키는지 알만하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한 사람의 끝도 없는 불행을 전시했다는 점에서 (이 이야기가 소설임을 감안하더라도) 이렇게까지 많이 팔릴 소설은 아니었다라고 생각하는 측면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 이 책이 잘 팔리자 악평을 번역기로 돌려가면서까지 깎아내리는 사람들이 있음을 목격하고 나니, 역시 알만하다고 생각했다. 이 책을 베스트 셀러로 만든 건 놀랍게도 바로 성차별주의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