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늦는 밤이면 엄마의 이야기는 시작됐다. 대개 할아버지나 아버지에 대해 맺힌 일들에 대한 이야기였으므로, 아직 중, 고등학생 밖에 되지 않았던 소년은 못이 박히도록 들어 그 뻔하고 익숙한 레퍼토리가 지겨웠다. 아버지는 늦는 일이 잦았다. 설거지를 하는 엄마의 등 뒤를 가만히 바라보며 침묵에 빠지는 날이 점점 많아진 건, 그 때문이었다. 꼬장꼬장했던 할아버지와 무심했던 아버지. 두 남자아이의 탄생부터 그때까지 이어져왔던 삶의 무게에 대한 이야기들은, 파도 끝이 없었고 해도 그칠 줄을 몰랐다. 차가 생기지 전까지 2시간 내내 울어대던 아이를 끌어안고 여름마다 내려가야 했던 고속도로 위의 삶은 그렇게 아이가 열 살이 되고 엄마 스스로 속박을 벗어던지기 전까지 이어졌다. 아버지는 아이가 태어나는 것에도 관심이 없을 만큼 무심했던 사람이라, 둘째 아이를 꺼내기 위해 배를 가르던 그 시간까지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했다. 집안일을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줄 모르는 이들을 위해 쓸고 닦으며 화를 내봤지만, 벽은 흔들리지 않았다. 엄마는 지쳤다고 했다. 그렇게 쏟아지는 말들 속에서 설거지, 빨래, 밥 짓기를 배웠다. 설거지를 하는 물소리를 들으며 이야기를 듣던 소년은 어느 순간부터 등 뒤로 들려오는 푸념을 들으며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들은 이후로도 한참을 그칠 줄 몰랐지만, 소년은 그렇게 자랐다.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이 생각보다 삼삼하다고 느꼈던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지영 씨의 삶은, <인형의 집>이나 <영자의 전성시대>,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과 같은 극적인 여성의 비극적 삶의 이야기에 비해서는 평범해서 단조로웠다. 말 그대로 어디에나 있을 것 같은, 그래서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이들 중 누군가 갑자기 일어나‘사실 내가 김지영이었어’라고 말한다고 한들 놀라지 않을 정도의 이야기였다. 가족, 학교생활, 연애, 직업 선택에 이르는 평범한 삶들은 무던히 흘러갔지만, 그 중심에는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당연시 여겨지며 강제로 받아들여야 했던 일들이 빈번했다. 보통의 삶, 보편적인 삶을 살아갔지만 그 과정들에는 차별이 있었다. 상처가 남았다. 그렇기에 김지영 씨는 유일한 김지영인 동시에, 어디에나 있는 여자 김지영이었다. 그랬기에, 김지영씨는 그의 선배인 차승연이 될 수 있었고, 그의 어머니인 오미숙씨가 될 수 있었다. 그렇게, “김지영씨는 한 번씩 다른 사림이 되었다. 살아 있는 사람이기도 했고, 죽은 사람이기도 했는데, 모두 김지영 씨 주변의 여자였다. 아무리 봐도 장난을 치거나 사람들을 속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정말, 감쪽같이, 완벽하게, 그 사람이 되었다.(p 165)”
문제는 이 ‘보편’의 문장이 대개는 여성의 문제로만 한정되어 버린다는 데에 있다. 스스로를 ‘평범하지 않은 40대’ 남자로 칭하는 권말의 남자 의사의 독백. 그는 아내의 복직을 바라며 초등학교 수학 문제집 푸는 것에 심취한 아내를 걱정하지만, 동료인 이수연 선생의 ‘임시’ 퇴직을 바라보며 “후임은 미혼으로 알아봐야겠다.”라는 말을 거리낌 없이 하는 모순적 인간이다. 행간 어디에도 죄책감이나 부끄러움이 느껴지지 않는 건, 그가 자신의 생각이 잘못됐다는 걸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또 다른 ‘보편’인 남성들의 시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시혜와 연민으로 만들어진 ‘이해’는 진상을 감춰버린다. 이때의 ‘이해’는 개인의 성품의 문제나 능력의 차이와는 구별된다. 그저 남자로서 알 수 없는 것을 알 수 없을 뿐이고, 알 수 없는 일을 아는 척 하기에 발생하는 문제다. 이를 공감의 영역에서 보편의 문제로 인식하는 대신 개인의 사정으로 모든 문제를 귀결시킨 순간, 우리 모두의 김지영 씨는 그저 “일주일에 두 번, 45분씩 상담”을 받아야 하는 한 명의 내담자로 전락할 뿐이다.
소년이 거뭇거뭇한 수염을 격일로 잘라야 하는 나이까지 자라고 나서도,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오래된 동아리의 - 남자 선배 중심적 - 문화를 바꾸려는 소용돌이 속에서 가장 많이 조우했던 것은, 여자임에도 ‘김지영’씨 보다는 ‘남자 의사’에 가까웠던 ‘생물학적 여성’, 명예 남자들이었다. 목소리도, 온도차도 달랐던 이들은 짐짓 “어린 여자 대학생들이 그렇게(직접적이진 않지만 간접적으로 내몰리게 되는 성추행의 위기들, 혹은 그러한 분위기) 내몰리는 상황은 막아야지”라는 말에는 당연하다는 듯 공감했고, 심지어 격분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 일부 아이들이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냐는 말부터 나 자신은 그런 문제를 느낀 적이 없다는 말까지 흘러나왔다. 다른 영역들에서는 여성의 권리를, 보호받고 존중받고 동등하게 대우받을 권리를 말했고, 말했을 사람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애정이라는 이유를 들며 “급진적으로 ‘문화’를 바꾸려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냐”라고 말하는 이들과 함께 설 때, 소년은 할 말이 없었다. 그는 생물학적으로 남성이었고, 페미니스트가 되기엔 너무 무딘 성적 감수성을 지녔다. 메갈리아를 불편해했고, 페미니즘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이들을 혐오했다. 그런 그가, 진짜 여성들을 설득할 수 있을 남성이 될 수 있을 것이란 자신이 없었다. “오빠들의 페미니즘”에 빠져, 스스로 ‘남자 의사’로 타락할지 모를 자신을, 소년은 감당할 수 없었다. 혼란 속에서, 말을 잃었다.
소년은 다만 다시 책을 들어 읽을 뿐이다. 평범한 단어와 통계 수치들 사이에 담긴 이야기들을 눈에 담고, 건조하게 쓰인 문장에 숨은 아픔을 찾는다. 그에게는 답이 없으므로, 책을 통해 모든 이야기들의 시작을 찾는다. 설거지를 하던 엄마의 뒷모습을 기억한다. 거창한 주장과 생각에 갇히는 대신, 어린 나이에도 들으며 답답했고 억울했던 이야기들이 흐르던 시간들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것이, 비단 우리 가족만의 문제가 아니었음을, 복기한다.
김지영씨의 문제를 김지영씨만의 문제로만 귀결시켜서는 안 된다. 비극은 영화처럼 극적이지 않고, 삶 기저를 휘감으며 느리지만 끈질기게 흘러간다. <82년생 김지영>이 구사하는 보편적 문장, 공감의 언어의 힘은 그 비극을 단순히 ‘한 명에게 벌어진, 어쩌다 발생한 이야기’로 끝내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모두가 김지영이었고, 아직까지 김지영이다.
내가 알게 된 것은, 다만 그것뿐이었다.
* 개인 블로그 등에도 같이 올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