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다들 각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물론 이 말이 서로간의 관계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삶은 각자의 삶입니다. 관계는 하나의 요소일 뿐, 중심은 늘 자기 자신의 삶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원음으로 듣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은 그 생각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분해되고, 다시 재구축 되어 그 사람의 생각이라는 이름의 나의 생각이 됩니다. 제가 82년생 김지영씨의 삶을 보고 생각하는 지점은,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그의 삶이 아닌, 삶이라고 생각되는 제가 바라보는 무언가일 것입니다.
이야기는 크게 셋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도입부에서 보이는 아픔, 중반부를 채우는 과거의 삶, 후반부엔 아픔으로 인해 정신과에 찾아가 이야기를 한 김지영씨와 그를 진단한 의사의 독백이 있습니다. 기저에 흐르는 것은 만연한 여성혐오입니다. 아직도 그 단어의 사용과 정당성에 대해 사회에선 끝없는 갑론을박이 있습니다만,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다고 우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물론 그것이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라는 김춘수 시인의 시처럼, 여성혐오라는 이름을 붙이기 전까지 그것은 여성혐오가 아니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이제 그것은 이름을 얻었고, 이 책은 특히 그러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도입부에서 제가 보는 김지영씨의 삶은, 그 실체와 괴리가 있을 수 있다 썼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저는 김지영씨를 아프게 한 세계의 수혜자이기 때문입니다. 불과 수년전까지 제 세대에서 저는 어머니의 가족과 아버지의 가족을 통틀어 유일한 남아였고, 그에 따른 혈족들의 대우는 여성으로 태어난 사촌동생들과 현격하게 달랐습니다. 체제의 수호자였던 할머니의 권위 하에서, 남성이었던 저는 모든 가사노동으로부터 면제받았고, 동생들은 초등학생의 어린 나이에도 가사노동에 관심을 가지고 협조적인 모습을 보여야만 했습니다. 그때 했던 제게 절대적 사랑을 주시는 분을 거역할 수 없다는 생각, 성인이 아니기에 말해선 안된다는 생각, 그리고 남자라서 다행이다라는 생각까지. 폭력에서 눈 돌리고 싶어서, 가해자인 자신을 부정하고 싶어서 했던 생각들. 저는 존재 자체로 가해자였고, 그것으로 다친 삶을 볼 때의 제 시선은 방어적이고 체제 순응적이었습니다.
책을 읽고 고민했습니다. 글을 쓰고 싶었는데, 감히 네가 쓸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한들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미 다쳐버린 수많은 김지영씨들에게, 제가 과연 무슨 염치로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써야 했습니다. 이해한다는 위선적인 말을 하고자 함이 아니라, 그저 보았다라는 말을 한마디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삶을 보았노라고, 지금까지 말하지 않아서 미안하다고. 세상이 바뀌는 속도는 현저히 느리지만, 언젠간 꿈꾸던 나날이 올거라고. 내 자신이 적극적으로 바꿔나갈 자신은 없지만, 그 바꾸고자 하는 열의가 꺾이지 않을 수 있게 조용히 옆에서 돕겠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