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레지구에 있는 타센 책방에서 산 책. 많은 거장들 중 그를 택한 이유에는 때마침 책이 세일중이었다는 사실도 있지만 근대 서양미술사에 있어 세잔에 대한 이해는 필수에 가깝기 때문이다. 세잔은 후기인상주의라 불리는 화가들 중 가장 인상주의와 거리가 멀면서도 또 가까운, 재밌는 작가다. 그러면서도 후대의 모더니즘에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는 평을 받는다. 색에 대한 무한 애정을 생각하면 세잔은 마티스 쪽에 더 가깝지만 피카소의 입체주의와 세잔의 사과가 아무 연관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마침 피카소미술관을 갔다온 뒤라 더욱 의미심장한 선택이었다.
서양 미술사의 내로라하는 화가들의 삶은 아버지의 전폭적 지지냐 거센 반대냐로 대강 나눌 수 있는 것 같다. 세잔은 후자. 은행가였던 세잔의 아버지는 아들의 미술 공부를 반대하고 금전적인 압박을 가했다. 소심하고 우유부단했던 세잔은 아버지의 사업을 도왔지만 결국 파리로 온다. 이 도전에는 그의 친구 에밀 졸라의 영향이 컸다. 말년의 소설에서 세잔을 모티프로 한 울적한 캐릭터를 만들어 내 사이가 멀어지지만 그는 세잔의 젊은 시절 중 큰 부분을 차지했다. 작년에 세잔을 다룬 영화 '나의 위대한 친구 세잔'가 나온 것을 포스터로만 봤었는데 이참에 다시 봐야겠다. 에밀 졸라와의 관계가 흥미진진하게 묘사되어 있다고 한다.
세잔은 파리와 맞는 화가가 아니었다. 물론 그는 새롭게 주목을 받는 인상주의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한때 피사로에게 그림을 배웠으며 르누아르, 모네 등과 함께 첫 번째 무명화가전에 작품을 출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인상주의의 활기차고 부드러운 분위기와 거리가 멀뿐더러 아카데미즘과는 더더욱 맞지 않았다. 그는 프로방스 지방으로 돌아와 남은 여생을 에스타크와 액스, 액상프로방스에서 산다. 기회가 된다면 남부 프랑스에 가서 그가 화폭에 담았던 자연의 강렬한 색채들을 직접 확인하고 싶다.
세잔의 그림은 잘 그린듯 하면서도 뭔가 미심쩍다. 선이 삐뚤삐뚤한 것 같은데 이상하게 안정적이다. 그는 균형감이 드러나지 않으면 작품을 완성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균형이라는 것은 정확한 묘사와 원근법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캔버스의 네모 틀 안에서 재창조되는 구도. 그 안정감을 위해서라면 그는 과감하게 책상을 휘게 하고 사람의 팔을 늘렸다. 현실의 아주 작은 한 조각에 불과하더라도 일단 그의 화폭에 담긴 이상 모든 대상은 중요하다. 따라서 그는 뒤에 있는 사물일수록 흐릿하게 그리는 인상주의의 방법을 따르지 않았다. 말년의 유명한 생 빅투아르 산 연작을 보면 맨 뒤의 산이 앞에 르푸소아르(repoussoir: 그림의 원근감을 강조하기 위해 앞에 그려지는 인물 또는 물건)로 그려진 나무들만큼이나 뚜렷하다. 이는 테이블 위의 사과를 그린 정물화에서도, 카드 게임을 하는 사람들을 그린 인물화에서도 마찬가지다. 각각의 사물은 세잔의 조심스러운 배치 속에서 만유인력처럼 서로 긴장을 조성한다. 마치 대상들을 따로 그린 뒤 오려서 캔버스 위에 모아놓은 것 같다.
세잔의 구성을 완성시키는 것은 색이었다. 인상주의가 앞서 제시한 색이라는 키워드에 세잔은 형태와 깊이를 포함한 무구한 의미를 덧씌웠다. 그에게 색이 없는 스케치나 소묘는 그림의 전단계일 뿐이었다. 대상과 대상을 구분짓는 건 인위적인 선이 아니라 색의 차이였다. 이때 르누아르나 모네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빛은 세잔에게 표현의 대상이 아니었다. 각각 오려 붙인 대상들은 동등하게 골고루 조명을 받아야했다.
왜?
그는 변하는 현실을 영원히 담을 수 있는 그림의 보존적 가치를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의 그림은 단순히 그 순간의 장면을 포착한 것이 아니라 안정적인 구조와 조명 아래 저장된 현실이다. 그의 정물화는 사과와 물병과 식탁보의 가장 아름다운 옆면과 윗면과 구김살이 모인 하나의 아카이브다. 나날이 변하는 파리의 도심을 떠나 사시사철 푸른빛을 자랑하는 프로방스에서 세월을 보낸 것도 이런 그의 사고에서 나온 게 아닐까. 변해버린 에밀 졸라와의 우정에도 회의감이 들어 어릴적 친구들과 목욕했던 장면을 노년기에 그렸던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