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종교와 참된 과학은 결국 같은 지점을 향해 나아간다. - 이 책을 읽은 한 줄 감상.
종교인으로서의 나를 자각한 이후, 나는 과학과 종교간의 갈등을 떠올릴 때마다 항상 마음이 불편했다. 투철한 무신론자 혹은 맹신적인 근본주의자였다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종교와 과학은 결국 평화롭게 공존할 수 없는가? 그렇다면 적어도 어느 한쪽이 사기를 치고 있단 건데 그것은 과학인가 종교인가?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나는 종교의 편을 들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과학이 내놓는 실질적인 근거들에 비해 종교의 믿음은 연약해보였다(그리고 실제로 대부분의 경우 그렇다고 생각한다). 종교가 옳다 해도 ‘만물에 자신의 능력과 신성이 보여 당신을 알도록 하셨다’는 신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는 여전히 난감했다.
소설의 주인공 에드먼드 커시는 무신론자로서 인류의 기원과 종말(?)에 관한 일생일대의 연구결과를 세상에 알렸다. 그의 목적은 ‘어두운 종교는 떠나고 달콤한 과학이 지배할’ 세상을 여는 것이었다. 소설은 열린 결말로 끝났지만 이 목적은 훌륭하게 달성될 것으로 보인다.
한 우주에 거하고 있는 인류에게는 두 영역을 하나로 융합시켜야 하는 과제가 있다. 그러기 위해 귀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무신론자는 자신의 믿음을(특정 신을 믿는 것만 아니라 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다른 방식의 믿음이다) 뒷받침하는 근거로 과학을, 정확히는 종교의 비과학적 측면들을 이야기한다. 종교인은 자신들의 믿음이 과학과 기술발전이라는 적그리스도에게 밀려 쇠할까 전전긍긍한다. 어느 쪽도 진리를 추구하는 모습이 아니다. 이미 자신의 경험과 가치관 등에 따라 형성된 틀에 세상을 끼워맞추려는 본질에서 벗어난 모습이다. 과학은 신이 없음을 증명해주는 것이 아니고 종교는 과학적 증거를 부정하는 옹졸한 가르침이 아니다.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성경을 가지고 이야기해보겠다. 분명 성경에는 글자 그대로의 진실만이 아닌 비유와 상징이 있고 신서(神書)의 말씀을 가감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요한계시록 22장 18~19절 참조) 기록되어 있다. 과연 진화론이 창세기에 위반되는가? 아니면 창세기를 글자 그대로 바보같이 풀이해서 가르치고 배우는 소경의 맹신에 위배되는가? 세상을 창조한 신이라면은 신은 겨우 우주의 먼지만도 못한 (그러나 자신의 모양과 형상대로 창조하여 가장 사랑하는) 피조물에게 존립이 좌우될 존재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종교인은 자신의 믿음에 오류가 있을 가능성에 언제나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결코 부적절한 타협이 아니다.
작가가 책의 제목을 탁월하게 지은 것 같다. ORIGIN(기원). 에덴 동산에서 네 줄기의 강이 흘러나왔듯 하나에서 갈라진 모든 것들이 다시 하나로 모일 때가 되었음을 암시하는 제목이다. 그 유토피아가 속히 오기를 소망한다.